아이 겨울옷을 사러 주말, 다 함께 쇼핑에 나섰다.
아이는 어릴 때부터 유독 옷 입히기가 어려웠다. 기저귀를 채울 때면 소금 친 미꾸라지마냥 팔딱거리며 앞뒤로 뒤집어서 애를 먹이더니 길 수 있게 된 뒤로는 냅다 도망까지 다녀 기저귀를 갈고 옷을 입힐 때마다 진땀을 뺐었다.
크면 좀 나을 줄 알았는데 아이는 클수록 몸에 걸치는 모든 것을 불편하게 생각했다.
유치원을 다니는 3년 내내 원복을 안 입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아침마다 힘겨운 실랑이를 해야 했다. 자신의 피부처럼 들러붙어있는 내복 차림으로 등원을 하라고 했으면 아이는 신나게 유치원을 다녔을지도 모른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아이는 또래에 비해 촉각이 발달한 아이였다. 자신의 담요와 다른 이불의 부드러움이 다르다는 걸 일찌감치 알아챘고, 피부에 닿는 감촉으로 재질별로 불편한 옷을 가렸다. 그러다 보니 새 옷 보다 물려받은 옷을 더 잘 입었다. 늘어날 대로 늘어나 자신의 몸을 옥죄지 않는 헐렁함을 좋아했던 것이다.
(여담인데 촉각과 미각은 긴밀하게 연결된 것인지 아이는 만져보는 것으로 만족이 안 되면 입에 넣어서 맛을 보곤 했었다. 종이마다 맛이 다르다는 알 수 없는 말을 하기도 하고 나 몰래 수많은 플라스틱과 쇠, 흙 맛을 보기도 했다.)
사춘기 남학생이 된 지금도 촉감에 민감하기는 여전해서 아이 옷을 고를 때 최우선 고려사항은 색이나 모양이 아니라 입었을 때 편안함이다. 그런 아이가 코로나로 인해 갑자기 확 찐자가 된 바람에 그동안 잘 입던 트레이닝복 조차도 타박을 놓고 있는 실정이다. 자신의 뱃살을 짓누르는 고무줄이 불편하다고 아침마다 옷장 앞에서 호소를 하고 있다.
사춘기 아이를 겪어 본 이들은 내 심정을 잘 알 테다. 요맘때 아이들 옷 사주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집집마다 애들이 옷을 고를 때 유난을 떨어 비위 맞추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우리 집 사정은 조금 결이 다르다. 주니어 키에 중년 남성 배 사이즈의 허리 탓에 언감생심 디자인을 고를 처지가 못 된다.
쇼핑몰에 들어서며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오늘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기를. 아이의 배를 견뎌 줄 고무줄이 달린 바지를 부디 찾을 수 있기를.
쇼핑이 시작되고 아이가 의외로 점퍼와 티셔츠를 단 한 번에 골라 오늘 왠지 느낌이 좋다 했더니 역시 바지가 난관이었다. 늘리는 대로 죽죽 늘어나 어디 한 군데 불편한 곳이라고 없어 보이는 바지를 고무줄이 너무 두꺼워 허리가 조인다며 입는 족족 퇴짜를 놓았다. 요즘은 그런 얇은 고무줄로 된 바지가 잘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오늘은 더 이상 쇼핑을 하지 않겠다고 선포를 했다.
나도 그만 지쳐 반쯤 포기상태가 되었을 때 저쪽에서 옷을 뒤적이던 남편이 무언가를 들고 왔다. 남편의 표정에서 이 쇼핑의 끝이 어쩌면 해피엔딩일 수도 있겠다는 한 줄기 희망을 읽었다. 남편 손에 들린 것은 바로 아이가 그토록 원하던 얇은 고무줄이 둘러진 바지였다.
심봤다는 말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산삼을 캐낸 심마니에게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주며 아이가 탈의실에서 나오길 기다렸다. 드디어 탈의실 문이 열리고 아이의 얼굴에는 마침내 자신의 배를 생긴 대로 인정해주는 옷을 찾은 기쁨이 흘러넘쳤다.
바지를 골라 마음의 짐을 내려놓자 그제야 여유가 생겼다. 정말 큰맘 먹고 와서 돈도 제법 쓴 마당에 저 좋으라고 옷만 덜렁 사줄 수 없다는 지극히 엄마스런 생각이 들어 남편이 계산을 할 동안 아이를 붙들었다.
그때부터 공부가 별거냐, 모든 곳이 공부를 하는 장소가 될 수 있다, 옷을 고르며 색과 디자인을 구경하는 것도 미술공부다, 사야 할 품목에 따라 돈을 알맞게 분배하고 네게 맞는 옷을 고를 줄 아는 것이야말로 쇼핑의 덕목이다 등등 군소리를 해댔다.
어디까지나 쇼핑이 끝나 홀가분해진 아이는 심드렁했다. 갈수록 아이의 대답이 시들시들해진다 싶을 즈음 어느샌가 옆에 와있던 중년의 점원이 불쑥 끼어들었다.
“엄마가 차분히 설명을 정말 잘해주신다. 아이랑 옷 사러 와서 싸우는 엄마들도 많은데. 저도 좀 배워야겠어요.”
깜빡이도 없이 갑자기 끼어든 말에 너무 당황해 내가 말문이 막히자 아이는 자기 엄마 말에 급브레이크를 밟아 준 이 상황에 아주 만족해하는 듯했다.
집으로 돌아와 남편이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옷을 정리했다. 카드 영수증을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아이 바지에 달린 택을 가위로 자르다 무심히 금액에 눈길이 갔다.
‘만 구천 원?’
세일 기간이라고 하지만 너무 싸다고 생각하는 순간 불길하게 매달려있는 숫자 0이 끝에 한 개 더 보였다.
‘얼마라는 거야? 십... 구만 원?!’
“여보, 이 바지 얼마인지 알고 계산한 거야?”
“어? 바지만 얼마인지는 모르겠는데. 다른 옷이랑 한꺼번에 계산해서. 왜?”
“십 구만 원이야.”
“뭐? 그렇게 비쌀 리가 없는데...”
남편이 말꼬리를 흐리는 동안 쓰레기통에서 영수증 조각들을 찾아내 이어 붙였다. 바지 가격의 비밀을 풀어 줄 마지막 영수증 조각이 맞춰지는 순간 그럴 리가 없다는 남편의 중얼거림이 쑥 들어갔다.
바로 매장에 전화를 걸었다.
“특수 기능성 바지라 그래요. 겨울철 등산할 때 입어도 바람이 하나도 안 들어가거든요.”
아까 그렇게나 엄마 티를 내며 쇼핑의 덕목이랍시고 줄줄 읊어대던 위풍당당함은 어디로 가버리고 구차하게 사과의 목록을 절절히 늘어놓았다.
그렇게 비싼 옷인 줄 몰라서 죄송하고 아이가 입을 거라 그런 고가의 옷을 살 수 없어 죄송하고 아이가 히말라야 14좌를 등반할 리 없으니 죄송하고 아이는 고작해야 학교 오가는 길에 입을 것이라 죄송하고 경솔하게 가위질로 소중한 택을 떼어버려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를 하며 내일 환불처리를 하러 가겠노라 말을 전했다.
통화가 끝난 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아이에게 오늘 배운 쇼핑의 덕목을 기억하는지 물어보았다.
“음, 돈을 잘 나누어 써야 한다는 거, 포인트나 할인쿠폰을 꼼꼼히 챙기고 내 몸에 잘 맞는 옷을 평소에 알아둬야 한다는 거, 또 미술공부도 된다는거.”
“아들, 가장 중요한 쇼핑의 덕목은 그런 게 아니야.”
“그럼 뭐야?”
“사기 전에 반드시 가격을 물어봐야 한다는 거야.”
환불을 못 해준다고 퇴짜를 맞았으면 그 바지를 본인이 입고 안나푸르나에 깃발을 꽂으러 쫓겨나지나 않을까 내심 마음을 졸이다 한시름 덜은 남편의 등이 순간 흠칫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