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더워서 살만하다. 더운 게 좋다기보다 추운 게 너무 싫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름이 낫다.
겨울에 태어났으면서 뭔 추위를 그렇게 타냐는 친구의 타박에 가장 약한 인간의 형태로 난 계절이 겨울이라 뇌리에 추위의 공포가 각인된 거 아닐까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한낮이면 삼계탕 국물에 빠진 닭이 된 기분이다. 걸쭉한 공기 사이를 휘저으며 집안일을 해치운다. 여름동안 가장 에어컨과 멀리 떨어진 끝 방을 사용하는데 동향이라 이른 아침부터 해가 눈부셔 하루를 일찍 시작할 수밖에 없기도 하지만 대체로 추위 때문에 거의 동면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 겨울에 비해 여름에 부지런하다.
여름이 되었다고 이 집에 기거하는 인간만 근면모드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 서식하고 있는 모든 생명들이 바지런을 피운다.
대대손손 터줏대감 거미부터 잊을만하면 한 번씩 깜짝 방문으로 놀래 주는 바퀴벌레, 이름으로 치사하게 양심공격을 하는 하루살이, 탄수화물 소울메이트 권연벌레, 여름한정 인기폭발 초파리에 따뜻한 곳은커녕 울 집 냉장고 속에서도 잘만 자라는 곰팡이까지 여름강호의 주인공이 되려는 협객들의 대향연이다.
적수의 등장에 질세라 내 손놀림도 바빠진다.
눈뜨자마자 거실 한복판에서 헤매고 있는 바퀴벌레를 (이럴 때 유용하기 그지없는) 아이 어릴 적 그림책으로 납작하게 해 주고 행여 초파리에게 양보하게 될까 봐 아침 먹은 뒤처리를 신속하게 해치웠다. 샤워커튼에 닌자처럼 숨어있는 곰팡이를 처치하려 세탁기에 집어넣어 놓고 매실청과 레몬즙을 섞어 에이드를 만들어 식탁에 앉았다.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번 주 폭염이 시작되고 엄마는 밥을 챙겨 먹었는지 확인 전화를 거의 매일 하고 있다. 똑같은 감시를 저녁에는 시어머니에게 받는 입장이다.
거꾸로 돼도 한참 거꾸로 된 안부전화를 두 어머니에게 돌아가며 받는 탓에 입맛 없다고 굶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내 입에 밥 넣는 정도 효도도 못하는 불효자가 될 순 없으니까.
다행히 여름에는 좋아하는 식재료가 제철이다. 상추, 오이고추, 토마토, 감자, 양파, 복숭아, 자두, 수박 등등 먹거리가 넘쳐난다.
엄마의 잔소리가 시작되기 전에 냉큼 식단 보고를 한다.
“아침에 닭 가슴살 토마토 달걀볶음, 점심에 오이고추랑 상추쌈, 저녁에 갈치조림 해 먹을 거야.”
“그래, 잘했다.”
반백 살이나 된 자식을 어릴 때와 변함이 없이 생각하는 엄마의 걱정을 덜어줄 겸 내친김에 냉장고를 털었다.
냉동실 한 칸을 꽉 채우고 있던 대용량 냉동블루베리 봉지를 꺼내 잼을 만들려고 냄비에 부어놓고 냉장실을 뒤졌다. 이미 껍데기 한두 장씩은 물러지기 시작한 양파 한 봉지가 채소칸 구석에서 발견됐다. 손질해서 양파수프를 만들어볼 생각이다.
아침이면 집 앞 나무 위에 종종 놀러 오는 새가 있다. 오늘은 여름친구인 매미와 함께 찾아와 목청을 높이고 있다. 새소리, 매미소리,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 선풍기 바람소리, 조용한 집에 여름소리가 소란하다.
여름 날씨에 취약한 아이가 며칠 전 더위에 지쳤는지 더위를 먹었는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겨울이 좋아. 겨울은 낭만이 있잖아.”
중년의 부모와 선긋기를 칼같이 하는 평소 논조로 보자면 낭만은 본인에게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지 않나 하는 항변은 속으로 하고 말았다.
아련한 표정이라니.
낭만 좋았지. 그래, 겨울찬가를 부를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겨라.
발과 무릎이 얼어서 부서질 것 같고 굳은 관절이 움직일 때마다 힘겨운 소리를 내며 영혼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몸이 되고 나면 달력에서 겨울 몇 달은 무의미하게 다가온다.
인생의 한여름을 벗어난 자신을 연민해 남편은 막걸리잔을 들고 왁스의 황혼의 문턱을 들으며 눈물을 훔치고 눈건강이 급격히 떨어진 나는 선풍기 바람에 눈물이 나는 여름 밤이다.
TV뉴스에서 기록적인 유럽 폭염 소식과 미국 텍사스주 홍수로 사망자가 속출한다는 소식이 흘러나온다. 요즘 여름은 무자비해 나같이 여름체질인 사람조차도 함부로 얕볼 수 없는 계절이 돼버렸다.
생업으로 바깥에서 일할 수밖에 없는 분들, 노약자 분들 모두 건강히 안전사고 없이 이번 여름을 잘 나길 기도해 본다.
오늘도 벌써 해가 뜨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