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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Feb 13. 2017

오늘도 지하철을 탔습니다

책 읽다 말고 딴생각 하기

지하철에서 아주머니들을 보면 마음이 짠하다. 자식 키우느라 고장 난 육신을 이끌고 빈자리를 향해 빛의 속도로 달려가는 것도 아주머니들이지만, 의자에 앉아서도 신경줄 놓지 못하고 생면부지의 사람 쿡쿡 찔러서 건너편 빈자리가 났음을 알려주는 것도 아주머니들이다. 
<은유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를 읽다가>



주말을 제외하곤 매일 지하철을 탄다. 학창 시절은 대부분 집 근처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나의 지하철 인생은 거의 직장생활과 동시에 시작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버스보다 지하철 쪽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반드시 한 권 이상의 책을 들고나가는 나로선 얼마큼 책에 집중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하다. (나는 '지하철에서 책 읽기'라는 매거진을 비정기로 연재하고 있다) 급 브레이크에 손잡이를 잡지 않으면 위험한 버스보다 일정한 움직임과 진동으로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지하철을 선호한다. 출퇴근하며 하루 두 번씩 지하철을 타다 보니 참 다양한 사람들과 마주친다. 지난주 목요일 퇴근길엔 신도림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자마자 운 좋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구로역에서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세 명의 중년 여성들이 탔고 둘은 자매 나머지 한 명은 모르는 사이였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지하철을 탐과 동시에 처음 보는 그들은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먹고 있던 델리만쥬를 내밀며 하나 드시라고 청하기도 할 만큼 강한 친화력을 보였다. 조금 수다스럽다 싶은 두 자매와 한 여성, 그렇게 5분여를 가다가 내 옆에 앉은 청년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다.


“저기요 청년, 혹시 어디 역까지 가요?”
“네? 저… 석수역까지 가는데요…?”
“아유 언니, 왜 앉아 있는 사람한테까지 부담을 줘어.”
“아니 그냥 물어본 거야. 미안해요 청년, 내가 다리가 너무 아파서…”

그러자 청년은 “여기 앉으세요”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매 중 동생은 손사래 치며 “아니에요, 얼른 앉아요. 내릴 때 앉으면 돼요.”라고 다급히 말했지만 좌불안석이었던 게 분명한 청년은 “곧 내려요. 앉으세요.”라고 친절히 대답했다. 젊은 사람들이 보기에 50대 여성은 자리를 내주기에 애매하다. 젊지도 늙지도 않았다. 자리를 내줬다가 오히려 기분 나빠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거나 그렇게 자리에 앉은 언니가 청년의 배려를 그저 감사하게 여기면 될 것을 한마디 덧붙였다.


“나는 새파랗게 젊은 20대 남자애들이 앉아 있으면 괜히 화가 나더라구.”
“……”
“아니 그렇잖아. 여자야 다리 힘이 없어 그렇다 쳐도 젊은 남자들이 뭐가 힘들어.”



요즘은 젊은 사람들이 앉아서 가야 돼요


오가는 대화 때문에 전혀 책에 집중할 수 없던 내가 가방에서 막 이어폰을 꺼내려던 찰나였다. 요즘 같은 세상에 저런 발언을! 속으로 뜨악한 나는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져 이어폰 꽂기를 잠시 멈추었다. (개인적으로 이런 일상의 대화는 흥미롭다.) 그러자 자매의 이야길 듣고 있던, 아까 자매와 같이 지하철에 동승한 ‘남’인 50대 여성이 입을 열었다.


“그런 소리 마세요. 요즘은 애들이 더 힘들어요. 공부하랴 아르바이트하랴 젊은이들이 더 힘든 세상이에요.”
듣고 있던 동생이 못내 언니의 발언이 불안했는지,
 “맞아요. 언니 그런 소리 마. 내 아들이 그런 취급받는다고 생각해봐. 난 젊은 애들 보면 우리 아들 생각나서 함부로 못해.”
 “그런가… 그래도…”

뭔가 쭈뼛거리던 그 ‘언니’는 다소 살벌해진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목적지만 물은 당신에게 벌떡 일어나 자리를 내준 청년이 아직 내리기도 전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지… 듣고 있던 내가 다 조마조마했다.


illust by 윤지민


SNS에서나 볼 수 있는, 화제의 영상 같은 모습을 바로 옆에서 목격하다니.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의 모이는 지하철이니까 가능한 현상이다. 출근할 때 거의 같은 위치에서 지하철을 타는데 꼭 코 골며 자는 아저씨가 있다. 내 집 안방처럼 편하게 취침하시는 바람에 남의 집 안방에 몰래 들어온 것처럼 불편한 건 내 몫이다. 오래전 퇴근길 지하철에서 누군가가 테이크아웃 잔에 담긴 커피를 들고 마시다가 실수로 바닥에 쏟았는데 다행히 사람이 많지 않아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건 아니었지만 지저분해진 바닥과 달리 전동차에 은은한 커피 향이 나서 괜히 남몰래 흐뭇했던 추억도 있다. 지하철 경험담 중 임신했던 때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시 혜화역에 위치했던 회사를 가려면 4호선을 1시간가량 타야 했는데 입덧 심한 초기엔 냄새 때문에 힘들었고 몸이 무거워진 말기엔 몸이 무거워 힘들었다. 둘 중 언제가 더 힘들었냐 묻는다면 당연 초기라고 할 수 있다. 배부를 땐 오히려 앉아 가는 게 힘들어 사람들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서서 가겠다고 한 적이 많았다. ‘겉으로 티가 나지 않는 임산부’였던 임신 초기는 대놓고 노약자석에 앉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바닥에 주저앉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임신하지 않았다면 귀 기울여 듣지 않았을 ‘겉으로 티가 나지 않는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해주라’는 방송이 왜 그렇게 눈물겹도록 감사하던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지하철


아이를 낳고 골다공증이 심해져 의사가 계단을 자제하라고 해 한동안 지하철 역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녔다. 한 번은 엘리베이터 문이 막 닫히려는 찰나 내가 헐레벌떡 뛰어서 탄 다음 타고 있던 사람들에게 죄송하기도 해 얼른 닫힘 버튼을 누르려는데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닫힘 버튼을 누르는 내 손을 거칠게 내리쳤다. 너무 놀란 나는 벙쩌서 할아버지를 쳐다봤고 나를 쏘아보는 그의 눈빛만으로도 ‘젊은것이 어딜!’하는 게 느껴졌다. 너무 황당하면 아무 말도 안 나오는 법. 그때가 딱 그랬다. 그렇게 난 아무 말도 못 하고 죄인처럼 숨죽였다. 그 뒤론 무릎이 아파도 절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는다.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겠다. 지하철 에피소드는 한편에서 끝낼 수 없을 만큼 수두룩하다. 매 순간 사람 사는 이야기에 집중하는 나는 지하철이 좋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길을 부지런히 움직여 주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지하철, 내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가장 긴 이동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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