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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미 Jan 26. 2018

모두 잠든 후에

책 읽다 말고 딴생각하기 

아이는 낚싯대를 창턱에 가만히 올려놓고 침대에서 내려온다. 눈이 먼다.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감는다. 아이는 오른팔을 뻗어서 벽을 쓸듯이 하고는 달려간다.

<전성태 ‘두 번의 자화상’을 읽다가>




언제부턴가 나 아닌 모든 사람들이 빨리 잠들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한다. 말의 뉘앙스에 따라 제법 무서울 법한데, 단순히 밤에 자는 잠을 의미하는 것이니 오해 마시길. 인물의 범위를 넓힐 것 까지도 없고 일단 식구 1, 2호부터 빨리 잤으면 좋겠다. 실질적 주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금요일 밤부터 나는 그들이 빨리 취침하길 바란다. 남편과 아이가 자야 나만의 시간이, 구태의연하지만 자유의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혼자를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 밤늦은 새벽 밖에 없다는 게 애석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그 시간에 뭔가 대단한 것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잠든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밀린 독서를 하거나 영화를 보는 것이다. 결혼 전이나 아이를 낳기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당연했던 그 시간들이 왜 이렇게 간절해졌을까?


아무렇지 않게 주어졌던 시간이
너무 간절해졌다


지난 주말에는 3주 전에 예매해 놓은 어린이 뮤지컬을 보여주기 위해 대치동에 다녀왔다. 기대만큼 재미있어하지 않는 아이 때문에 다소 실망하긴 했지만 뭐라도 했다는 것에 의의를 둘 뿐이다. 제법 의사 표현을 하기 시작한 아이는 요즘 부쩍 먹고 싶은 걸 이야기한다. 뮤지컬을 보고 나오자 아이가 피자를 먹자고 했다. (어떤 날은 짜장면이 먹고 싶다고 한다. ‘일요일은 짜파게티’라는 걸 알게 된 아이를 보며 다 키웠구나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어떤 음식에 대한 맛을 기억하고 그 이름을 생각해 내서 요구하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우리는 근처에 있는 코엑스로 향했다. 피자 한 판과 스파게티를 시켜 남김없이 싹 먹어 치우고 소화도 시킬 겸 주변을 배회하다가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간다고 해도 하루 일과가 끝난 것은 아니다. 아이를 씻기고 저녁을 먹이고 좀 놀아주다가 재워야 한다. 순순히 잠이라도 자면 괜찮게, 자라, 제발 자. 언제 잘 거야. (핑크퐁 보여주며) 이거 하나만 보고 자는 거다? 이런 말을 스무 번은 해야 아이는 잠이 든다. 아이를 재우다가 같이 잠들 때면 뭔가 억울하다. 나는 아이의 좁은 어깨를 토닥이다가도 나는 잠들지 않으려 애쓴다. 아이가 나의 작은 움직임에도 전혀 미동 없이 깊은 잠에 (드디어) 빠져든 시각은 밤 12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전날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과음을 하고도 뮤지컬 동행 미션을 성실히 수행해준 남편은 고단한지 어느샌가 나직이 코를 골기 시작했다. 고양이의 발걸음처럼 살금살금 침대에서 내려와 조용히 방 문을 닫고 나와 거실 소파에 털썩 앉았다.

illust by 이영채


나의 시간은 지금부터다. 뭘 할까 고민하던 나는 낮에 읽던 책을 몇 페이지 들춰보다가 집중이 되지 않아 아이패드를 꺼냈다. 보고 싶었던 영화 리스트를 체크하다가 돋보기가 그려진 검색 창에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를 쳤다. 혼자 영화를 볼 때면 내가 진짜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게 된다. 이런 영화가 있는데, 내용이 이렇고 평이 이렇데, 같이 볼래? 하고 구구절절 설득하지 않아도 되니까 백 퍼센트 내 취향의 영화를 고른다.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는 사랑이 권태로워진 한 남자와 그의 회사에 새로 들어온 여직원이 우연히 같은 꿈을 꾸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야기는 급 물살을 탄다. 영화가 시작되고 30분쯤 흘렀을 때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르고 주방에 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채소 칸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고 먹다 남은 닭다리를 챙겼다. 자리로 돌아와 캔을 따고 치킨이 들어 있는 봉지를 열었다. 치킨은 왜 식어도 맛있는지. 다시 재생 버튼을 누르고 영화를 보며 맥주를 마셨다. 영화는 기대 이상으로 마음에 들었다. (혼자) 보길 잘 했단 생각이 스쳤다. 남은 맥주를 다 마시고 뒷정리를 마친 뒤에도 잠들기 싫었다. 나는 책꽂이에서 일기장을 꺼내 테이블로 돌아왔다. 평소와 달리 내 곁에서 그르렁거리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일기를 썼다. 시계를 보니 3시가 훌쩍 넘어버렸다. 그래도 잠들기 싫은 나는 다시 책을 펼쳤다. 분명 몇 페이지 읽다가 나도 모르게 눈이 감길 게 뻔하지만 그래도 잠자리에 들긴 싫었다. 일요일 밤에는 누릴 수 없는 이 자유가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 같아 아쉬웠다.


내 시간이 소중하면
상대방의 시간도 소중한 법


누구에게나 혼자인 시간이 필요하다. 나만큼 혼자인 시간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식구 1호는 맡은 바 임무(아이 목욕이나 설거지나 청소기 돌리기 등)를 수행한 틈틈이 혼자만의 시간을 (꽤 오래) 갖는다. 그 시간에 주로 이층 자기만의 공간에 들어가 창문을 열어 놓고 전자담배를 피우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게임을 하는 것 같다. 백 퍼센트 혼자 내버려두기 위해 굳이 올라가 보지 않는다. 때론 그 혼자만의 시간을 빌미로 너무 오래 방치돼 있는 것 같아 “좀 내려와!”하고 각성을 해줘야 한다. 퍼뜩 정신을 차린 그는 다시 식구 1호, 남편 그리고 아이 아빠로 돌아온다. 혼자인 시간을 지켜주고 유지해주어야 함께인 시간도 행복할 수 있다. 내 시간을 지키기 위해 그의 시간 또는 아이의 시간도 배려해주는 게 이상적인 공동체의 삶이라 생각한다. 모르긴 몰라도 앞으로는 차차 지금보다 많은 혼자, 각자의 시간이 주어질 것이다. 혼자임을 즐기는 나는 그때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만큼 그 시간들이 두근두근 설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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