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푸켓으로 여행을 갔다. 모두에게 난 한국에 있는 걸로 되어있었다.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휴대폰의 '비행기 모드'를 풀지 않는 게 나의 여행 규칙이었는데 푸켓에선 그것을 어겼다. 첫날 저녁 울리는 전화를 피하지 못하고 받았다.
어설픈 나의 거짓말. 밀려오는 걱정들.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잊은 채 번민으로 가득 차 동네를 돌아다녔다.
나의 숙소는 수린과 방타오 사이쯤이었다.
수린 비치. 수린 비치는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작은 비치가 파도는 강했고 햇빛은 파도만큼 뜨거웠다. 히잡과 비키니가 공존하는 수린 비치의 이색적인 풍경을 보며 딱 내 마음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몸만 자유로운 비키니면 뭐하니 마음이 히잡처럼 어두운데... 좋기만 해야 할 이국의 아름다운 풍경위에 크레이프 케이크처럼 한국의 걱정들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좀 더 깊숙한 방타오 비치. 맑고 깊은 바닷물. 야자수 나무 그늘에 썬베드를 차지하고 앉아서 습관처럼 휴대폰 메신저를 들여다본다. 싫어하는 누군가와 그의 최근 근황이 눈에 들어오니 또 마음이 좋지가 않았다. 얽히고설켰던 지난 인연들이 떠오르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때 내 발 앞을 지나가던 금발의 아기 하나가 날 향해 밝게 웃어 보인다. 편하게 입고 나온 티셔츠에 커다란 토끼 한 마리. 그 토끼 덕에 여행지 어딜 가나 아기들이 날 좋아한다. 나에게 인지 토끼에게 인지 저마다 말로 인사를 하는 아기들 눈빛은 하나같이 똑같다. 사람이 왜 꽃보다 아름다운지 알 것 같은 순간, 내가 있는 곳을 다시 둘러본다. 일상의 일들과 지난 인연들을 생각하며 한숨짓기에는 터무니없이 아까운 곳에 지금 내가 있지 않은가.
망각의 유익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 모든 것을 한 번씩 싹 잊고 싶지만 일상을 살면서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여행이 필요했다. 해외여행의 장점이야말로 일상의 완벽한 탈피와 망각일 텐데, 이 곳까지 와서 나는바보 같은 휴대폰 때문에 큰 실수를 할뻔했다. 난 다시 그 유익을 취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커튼을 치듯 생각을 적시에 차단하고 휴대폰을 다시 비행기 모드로 바꿨다.
그리고 어느 여행지에서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 일,
챙 넓은 모자를 쓴 후 골목을 걷기 시작했다. 길은 신기하다. 앞을 보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설레임이 있고 뒤를 돌아보면 이미 지나온 것에 대한 안도와 편안함이 있다.
골목 끝에는 누군가가 사는 낡은 집이 있었다. 골목 끝에는 작은 기념품 가게도 있었고, 현지인들의 아침과 점심을 책임지는 손 바쁜 식당이 있었다. 그리고 골목 끝에는 바다가 있었다. 그때가 그곳의 우기라 했다. 걷다가 바다가 나오면 비싸지 않은 값을 내고 썬베드를 하나 빌려 맥주를 마신다.
그러다 우연히 들어간 작은 음식점. 그 후로 나는 수린에 머무는 동안 여러 끼 이곳을 찾았다. 멀리 바다를 보이게 두고 어느 날은 구슬픈 명상 음악이 반복적으로 나오고 어느 날은 라디오 방송의 같은 구간이 반복적으로 나왔다. 주문을 받고서는 한참 후에야 나오는 정성스런 음식, 바쁜 사람은 올 수 없는 곳. 그리고 한 글자 한 글자 손글씨로 적어서 작은 조약돌로 무게를 실어 가져다주던 예쁜 계산서.
무언가 부족하던 것이 마음가짐 하나로 완벽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이미 노력은 다 하지 않았는가. 무엇을 다해도 부족하다면 맨 마지막은 내 마음이다. 내 마음 하나 빼고 모든 게 완벽한 곳에 내가 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