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섦과 낯익음

클락키 강바람에는 이모집 마당 냄새가 묻어있다

by 피카타임

여행지를 만나는 것과 사람을 만나는 것은 비슷한 모습이다.
여행의 첫날은 누군가를 처음 만난 날처럼 설렘과 불편함이 공존한다.
그들의 인사말을 배워 열 번쯤 인사를 하는 동안 내 마음은 열릴 대로 활짝 열려 상대의 매력을 탐닉하고 그 속으로 빠져드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진다.
그때부턴 오히려 낯선 풍경을 만날수록 즐거움은 커진다.

가장 먼저 나를 대하는 새로움은 언어일 것이다.
저마다 영어를 쓴다 해도 나라마다 발음도 억양도 달리 들려서 가뜩이나 짧은 영어 실력에 여간 곤혹을 치르는 게 아니지만,
내가 여행을 왔구나를 가장 먼저 실감하게 하는 건
아침, 점심, 저녁으로 꼬박꼬박 달라지는 영어 인사다.
"굿이브닝" 누군가 부드러운 발음으로 나의 저녁 안부를 물어주면 그로서 진짜 여행이 시작되는 기분이다. 낯선 문화들이 사실 다 날 사로잡는 건 아니지만 하루를 살면서 해가 움직이는 시간에 따라 세밀히 물어주는 인사말들에서 긴장이 풀리고 기꺼이 그들 속에 들어갈 마음으로 준비가 마쳐진다.

그다음은 날씨이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공항 문밖을 나오면 난 늘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그 첫 숨 속에 그들의 날씨와 삶의 향기가 훅 들어온다.
단일 계절 속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늘 한결같은 맘이 든다. 추위를 무지 싫어하는 나로서는 그들의 계절이 부럽고 꿈만 같다. 건기와 우기가 있다지만 극명한 온도 차이로 나뉘는 계절과는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시간의 흐름을 오로지 시계와 달력으로만 느끼며 사는 기분은 어떨까. 계속되는 더위가 그들은 축복일까 때론 멈추지 못하는 저주일까.
난 더운 계절 속에 사는 그 사람들의 미소가 좋다. 그 미소는 그 날씨가 만들어낸 느긋함에서 오는 걸까.
미처 비행기에서 갈아입지 못하고 나는 겨울 패딩을 그대로 입고 여름나라에 입성한다. 그리고 그런 나의 옷을 바라보며 그들도 내 나라의 계절이 궁금할지 생각해본다.
더운 계절이 끝나고 찬바람이 불 때의 기분이 궁금한지 묻고 싶다.
그것보다 더 깊은 계절이 오면 두꺼운 옷으로 온몸을 보호하며 추위를 이겨내야 하는 기분이 궁금한지도 묻고 싶다.
칼바람, 오죽하면 얼어 내리는 공기, 그것을 볼 때 역설적인 아름다움.
그 모든 것이 다하면 꽃피는 봄을 맞는 그 설렘이 알고 싶지 않은지도 묻고 싶다.
일 년 내도록 같은 과일을 먹을 수 있는 이들이, 모든 생산을 멈춘 꽁꽁 언 땅이 깨어날 때까지 견디는 마음을, 그 시간을 위해 비축하고 대비하는 치열한 마음을.. 궁금해한다면... 기꺼이 노력해 표현해 줄텐데...

11월 말 홍콩 여행 시 디스커버리베이에 앉아 느긋하게 차를 마시던 순간이 생각난다. 디스커버리베이 입구에 커다란 크리스마스 장식 구조물이 있었고, 그 위에는 그곳의 온도를 나타내 주는 온도계가 있었다. 26도씨의 크리스마스라니.
싱가포르 오차르로드. 쇼핑백을 가득 든 내 두 반팔이 땀으로 끈적거리는 찰나였다. 캐럴이 거리 전체에 울려 퍼진다. 열대야속 크리스마스라니.
이렇듯 한겨울 속 여름나라로의 여행은 다른 세상 속으로 온 보람을 톡톡히 느끼게 할 만큼 모든 게 제대로 낯설고 즐겁다.


밤이 시작된 클락키. 그날 마지막 유람선을 탔다. 눈앞에 펼쳐진 생경한 야경에 마음을 빼앗겨 그저 황홀하다 할 때쯤 강바람이 분다.
그 강바람 속에 갑자기 어린 시절 놀던 이모네 집 마당이 떠오른다. 그때의 바람 속에 있던 향기.
난 종종 냄새로 과거를 추억한다.
약 한 시간쯤 강바람이 불 때마다 어린 시절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눈물이 맺힌다.
여행은 이토록 낯선 것을 찾아 떠난 곳에서 낯익은 것에 반가워 눈물이 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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