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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카타임 Nov 12. 2020

플라타너스가 아름다울 지라도


무채색 같은 11월의 단조로움을 채워주는 건 플라타너스 단풍이다. 

7년 전쯤 출근길이 바뀌고부터 플라타너스 단풍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
11월 중순이 넘어가면 그 나무는 빛을 내뿜는다.
노을 색과 가장 어울리는 빛을 내뿜으며 가을의 끝을 파티처럼 마무리한다.
플라타너스 단풍이 떨어지는 순간을 보는 건 즐거움이다.
소리 없이 떨어지는 다른 낙엽들과 다르게 무게가 실린 잎이 '툭'하고 떨어져 때론 차창에 부딪히기도 하고, 걸음을 잡는 방해꾼처럼 행인의 발끝에 기도 한다.
다랗게 플라타스 단풍이 떨어진 길에서는 그 잎을 하나 둘 세면서 걷는다. 맘만 먹으면 다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고는 꼭 그 잎을 밟고 지나가야 한다.  잘 마른 낙엽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발바닥에서 시작하여 마음까지 파고든다. 그래서 플라타너스 낙엽이 가득한 길에서는 항상 징검다리 걸음이다.


사랑은 때론 서운함이다.
사랑을 하다 보면 내 마음과 다른 순간에 부딪히게 된다.
내 사랑이 더 큰 것 같고 상대의 사랑이 작은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서운한 감정의 문제점은 따져 물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사랑은 정량을 두고 배급받는 음식처럼 내가 받는 몫이 더 작다고 물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그것은 잘잘못을 가려 시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미 날 서운하게 만든 그 마음의 본질은 드러나버린 상태이기 때문이다.

어제 저녁 무렵 찾아온 서운함은 아침이 됐는데도 잦아들질 않고 오히려 그 크기가 커져있었다.
여느 때와 달리 이번엔 난 침묵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면 나의 미완성된 인격이 어떤 모습을 드러낼지 뻔한 일이다.
내가 계획한 복수는... 내 마음을 서운하게 했던 일을 상대가 평생 미안해하며 살길... 지독하게 그 마음을 괴롭히길... 그전에 서운했던 내 마음을 먼저 깨달아줘야겠지만.

퇴근길 플라타너스 단풍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다가, 사람 대신 자연이나 동물 혹은 물건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이들을 생각했다.
한때는 그들이 무언가 대단한 해탈이나 한 것처럼 생각되었는데, 오늘 나의 마음과 비교해보니 참 쉽게 사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늘 같은 모습으로 모두에게 동일하게 있을 뿐이다. 언제나  미울 일 없으며 한 번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서운할 것도 상처 받을 것도 있 게 없다.


난 아니야... 난 적어도 아직은 아니야.

자연에 비할 바 없이 이랬다 저랬다 믿을 구석 하나 없고, 동물에 비할 바 없이 의리도 없고, 물건에 비할 바 없이 늙어 가지만 그래도 사람을 사랑하며 살고싶다.

서운하고 상처받고 화내고 때론 지옥 같아도 난 여전히 사람을 사랑하고싶다.


플라타너스 단풍 앞에서 잠시 서운함을 잊었다. 서운함이 마음을 다 채우고 있는 줄 알았는데 단풍이 들어올 틈이 있었다.
넌 그거면 된다. 내 마음이 누군가를 향한 미움으로 가득 차서 아예 못쓰게 되기 전에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마음에 공간만 남겨주면 된다.
그게 오늘의 플라타너스가 내게 다 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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