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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나 Aug 31. 2022

지금을 살다

이제부터는 틔워진 싹을 아름답게 키우고 성장시킬 차례이다

쫓기듯 떠난 지 6년 만의 캠퍼스였다. 도쿄대학교의 상징인 붉은색 문 ‘아카몬’과 고대 서양 건축기법을 닮은 아치는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일본 학생운동의 상징인 야스다 강당도 여전히 위풍당당했다. 예전과 같은 듯, 약간은 변한 듯 그 곳은 그대로였다.


일본유학을 중단하고 완전히 귀국을 한 뒤에도 도쿄를 방문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다녔던 학교 캠퍼스와 거주했던 동네만큼은 가지 않았다. 서둘러 일본 생활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던 그 때의 내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교정 곳곳마다 찍혀 있는 내 발자국을 대면할 용기가 아직은 없었다.


지도교수님은 학술교류를 위한 일본 도쿄대 방문 계획을 전하며 출장 준비를 부탁하셨다. 교수님 외에도 연구원 몇 명이 동행할 예정이었지만, 전체적인 일정과 동선을 짜는 것은 일본 거주경험이 있는 나의 일이었다.


엄마의 투병으로 일본생활을 접은 후, 몇 년 간은 엄마의 보호자, 결국엔 상주역할도 했었다. 엄마의 죽음은 아이러니하게도 고단했던 간병 생활을 단숨에 정리해주었다. 그러나 진짜는 그 때부터였다. 엄마와의 이별은 중단되었던 ‘나의 삶’을 다시 시작해야하는 것을 의미했다. 30대인 나는 마치 대입을 앞둔 수험생처럼 쫓기는 마음으로 오랜 시간동안 미래를 고민했고, 사회복지학 공부를 하기로 결정했다.


몇 년 동안의 경험은 개인적인 괴로움으로 끝낼 일이 아니라 생각됐다. 나와 비슷한 상황의 다른 이에게 내 이야기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동안의 고달픔이 무의미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자신을 위로하고 지난 시간을 가치롭게 받아들이기 위해 다시 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지도교수님과 연구원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출장일행들을 만난 김포공항은 그 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유학기간의 김포공항 출국장은 늘 꽃샘바람 같은 알싸한 외로움이 가득했다. 출국장 앞에서 느낀 부모님의 체취와 체온은, 신기하게도 출국장에 발을 디디는 순간 내 몸을 빠져나갔고 나는 덩그러니 혼자였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일행과 함께한 공항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온기가 감돌았다. 우리는 나란히 좌석에 앉아 비행을 즐겼다.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도착한 하네다 공항은 이겨내야 하는 일본생활의 관문이 아니었다. 새 삶을 시작한 내 모습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었다.


도쿄를 일행에게 안내하는 것은, 과거의 내 삶에 그들을 초대하는 일이었다. 도쿄대 교수님과 지도교수님이 앞서 걷는 모습을 보며, 캠퍼스에 찍혀있던 지난날의 내 발자국 위에 다시 새로운 발걸음을 얹었다. 늘 오갔던 거리와, 즐겨 다녔던 식당을 모두에게 소개하는 것은 차마 상상도 못했던 호사였다. 지도교수님은 지난날의 내 삶에 기꺼이 동참해주었고, 용감하게 일본생활을 해냈던 과거의 나를 격려해주셨다. 혼자서는 결코 마주할 수 없어 도망치기만 했던 그 공간을, 지금의 나를 인정해주는 이들의 힘을 빌려 다시 밟을 수 있었다.


이전의 전공이 아닌 새로운 학문을 선택한 이유는, 사실 과거를 지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부단히 노력하여 쌓아올렸던 나의 ‘성(城)’이 먼지와 함께 사뿐히 가라앉는 모습은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과거의 폐허를 완전히 덮어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꽃씨들은 과거를 거름으로 삼아 싹을 틔웠고 이제는 푸른 하늘을 향해 성장하고 있다.


3박 4일의 출장은 감사하게도 지난날의 나를 보듬고 받아들이는 시간이 되었다. 슈퍼와 성당을 향할 때마다 다녔던 이국의 그 거리와, 책을 안고 부지런히 뛰어다녔던 캠퍼스를 이제는 나 혼자서도 다시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도쿄 출장에서 돌아오고 나서 나는 바로 박사과정생의 생활을 시작했다.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이 지난날의 아픔과 화해하는 시간이었다면, 이제부터는 틔워진 싹을 아름답게 키우고 성장시킬 차례이다. 나는 다시 일어나 ‘지금’을 살고 있다.



2019년 에세이문학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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