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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나 Sep 01. 2022

고통과 축복, 그 어디쯤

십자가가 예수에게 고난이자 축복이듯.

그는 누군가를 그리워했고 고통스러워했다. 그것은 곁에서 죽음을 지켜본 사람만이 뱉을 수 있는 언어들이었다. 그가 페이스북에 남긴 글에는 직접적인 표현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활자와 활자 사이에는 붉은 선혈이 스미어 나오고 있었다. 나와 같은 일을 겪었으리라. 같은 상처를 지닌 사람에게만 보이는 그 무엇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에게 내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다. 엄마에게 뇌암 선고가 떨어지고 그로부터 시작된 1년 반의 투병 시간. 그리고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수술과, 그 다음날 나 혼자서 치러야 했던 엄마의 장례식을 말이다. ‘이런 일을 겪은 나도 이제는 그럭저럭 지내고 있으니, 당신도 힘을 내요.’라고.


컴퓨터 앞에 앉아 빠른 타자로 내 이야기를 그의 핸드폰에 전송했다. 내 메시지 옆의 숫자 ‘1’이 이미 지워졌으니 그는 분명 이걸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10분 가까이 지났을까. 드디어 답이 왔다.


“아…, 저도 누나와 같은 일을 겪었어요. 저희 어머니도 뇌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랬구나. 그의 말 한마디로 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그리고 그가 페이스북에 남긴 글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가 그에 대해 막연히 느꼈던 모든 것이 퍼즐처럼 맞춰졌다.






뇌암, 그러니까 악성 뇌종양은 무서운 병이었다. 환자는 운동능력과 언어·사고능력, 그 외에도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능력을 서서히 잃어갔다. 그러다 호흡능력마저 병마에게 빼앗기면 그저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나야 했다. 그도 핏줄의 그런 모습을 지켜봤던 것이었다. 눈물이 흘렀다. 나도 그도, 아직은 고통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며칠 후, 우리는 양파장아찌를 가운데에 둔 채 만났다. 그와 나는 지금까지 성당에서 오가며 가벼운 인사 정도 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이제는 무심히 알고 지냈던 예전의 관계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건네는 위로는 사실 잘 귀에 안 들어왔어요. 다들 그저 잊으라고만 했거든요. 다른 사람이 반찬을 주겠다 했으면 안 나왔을 거예요. 누나는 저와 같은 경험을 하셨으니까, 누나 말은 위로가 될 거 같아서 나왔어요.”


뭔가 개운한 표정으로 그가 나에게 말했다. 미소 환한 그의 얼굴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동안 큰 걱정거리 없이 살아왔다. 당연히 내 앞날도 평탄하리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 오만했던 믿음은 바스락, 모래처럼 허무하게 부수어졌다. 어느 이른 아침, 의사의 갑작스러운 호출에 병원으로 뛰어가서 무엇인가가 허옇게 자리 잡고 있는 엄마의 뇌 MRI 사진을 봤던 그 때 부터. 나는 제 정신인 듯 제 정신이 아닌 듯 몇 년을 살아왔다. 그것은 분노이면서도 절망의 세월이었다.


사람들은 남의 삶에 무책임한 관심이 많았다. 만약에 그 ‘관심’이 나름의 위로였다면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무신경하고 서툴렀다. 그들은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엄마를 보고도, 엄마의 병환으로 인해 중단한 공부를 계속하라 말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혼자 된 아버지를 너무 살뜰히 보살필 필요가 없다고 했으며, 심지어 엄마의 장례를 치른 지 겨우 두 달 된 나에게 아버지의 재혼을 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방식만을 강요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혼자서 엄마를 간병하고, 엄마의 장례식을 치러야 했던 그 마음을 당신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어. 당신들이 모르는 어둠을 나는 알아.’


과격하게 나를 드러내야 사람들은 자신의 언행을 부끄러워했고 미안해했다. 그러나 고백하면, 그 때 나는 묘한 우월감을 느꼈다. 그것은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갖고 있는 무용담이자, 남으로부터 나를 지켜내는 ‘무기’이기도 했다.


그와 나는 서로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성당 모임에 관한 이야기도 했다. 또 그냥 사는 이야기도 했다. 그 어느 것 하나 특별할 것 없는 대화였음에도, 그의 눈빛과 표정은 나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 마음에 둘러쳐진 두꺼운 얼음벽이 오히려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3년간의 나는 박제와도 같았다. 모든 것이 상황 종료가 된 후 정신을 차려보니, 엄마는 없어져버렸고 내 삶도 엄마의 MRI사진을 봤던 그 순간에서 멈추어 있었다. 시간은 흐르고 다른 것들도 시간의 물결 따라 흘러갔지만,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앞질러 가는 것을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할 수만 있으면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빛나는 그의 눈동자를 보며, 내 고통의 시간이 오히려 ‘재산’이었음을 깨닫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내 존재 자체에서 위로를 느낀다니. 그것은 나만의 능력이자 나에게만 주어진 축복인 것 같았다. ‘어머님은 자매님 안에 늘 함께 하신다’라던 어느 신부님의 말씀이 이것인가. 이상했다, 엄마가 나를 보듬고 있는 듯한 느낌. 말로 표현하기 힘든 행복이었다. 십자가가 예수에게 고난이자 축복이듯, 나에게는 엄마의 투병과 죽음이 그러하였다. 단단해진 나 자신은 엄마가 마지막으로 내게 준 선물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입을 조용히 닫았다. 더 이상 내 어둠의 시간을 내세우며 남에게 가시를 세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폭력 같은 설익은 위로의 말을 건네는 이도 더는 없었지만, 설사 있다 해도 그를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남이 하는 이야기는 이미 내게 무의미했다. 나에게는 자신을 다독거리고 바르게 세울 힘이 있었다.


나는 요즘도 그와 연락을 하며 서로의 안부를 챙긴다. 그와 얘기를 나눌 때면, 그의 모친과 우리 엄마가 어쩌면 그곳에서 만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두 여인은 각각 두고 온 외동딸과 외동아들이 안쓰러워서 힘들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 내 목소리가 하늘까지 닿는다면, 나는 크게 외치고 싶다. 우리는 잘 지내고 있다고, 그러니 걱정 말라고. 우리도 당신들을 사랑한다고.  




2016년 에세이문학 가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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