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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나 Aug 30. 2022

자랑스러운 유산

‘유산’이라는 말에는 떠난 이의 아름답던 삶이 그대로 녹아 있다

서랍에는 두툼한 서류봉투가 들어 있었다.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일까. 내용물들을 조심스레 꺼내보았다. 빽빽하게 채워져 있던 종이들은 뜻밖에도 각종 상장과 임명장이었다. ‘국민학교’라 적힌 것부터 '고등학교'라 적힌 것까지, 한 사람의 학창 시절이 색 하나 바래지 않고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다. 그것은 몇 달 전 세상을 떠난 엄마의 유품이었다.


상주 역할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장례식에는 정해진 순서와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서른이 넘은 딸에게도 "손님은 정중하게 맞이해야 한다."라고 늘 말해 왔었다. 그 덕에 혼자 빈소를 지키면서도 조문객 대접을 어려움 없이 할 수 있었다. 나는 장례 시간 동안 슬퍼할 겨를도 없이 어떻게 행동해야 엄마한테 칭찬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 골몰했다. 엄마의 삶이 나를 통해 품위 있게 마무리될 수 있길 바랐다.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였다.


몇 달에 걸쳐 각종 행정적인 처리를 겨우 마무리하고 나니, 엄마가 쓰던 물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건 정리를 해야겠다 싶었다. 몇 년 전 내가 선물했던 팔찌, 마음에 쏙 드는 것을 찾았다고 기뻐하며 샀던 핸드백, 아버지가 엄마에게 30년 전 선물했던 만년필, 그리고 엄마의 필체로 가득한 몇십 년 동안의 가계부 더미와 공책들. 물건에 스며있던 기억과 시간은 촉촉하게 배어 나와 내 손을 담뿍 적셨다. 모든 것에는 추억이 배어 있었다. 나는 그것들의 역사를 알고 있었고, 그것들 역시 엄마를 기억하고 있었다.


집 밖으로 내어놓을 것을 찾으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난감하게도 그 어느 것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는 서류봉투가 몇 개 들어 있었다. 내 어린 시절과 관련된 상장이나 편지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엄마의 학창 시절을 품고 있던 바로 그 봉투도 눈에 띄었다. 하지만 엄마는 평생을 귀하게 품고 있던 이것들과 함께 가지 못했다.


그리움은 순식간에 몰려왔고, 가슴은 요동쳤다. 그러나 나는 속눈썹 끝에 눈물방울을 단 채 피식 웃고 말았다. 이렇게 꼼꼼하게 모아 놓다니, 과연 엄마다웠다. 그래서 오히려 반가웠다. 답은 간단히 찾았다. 엄마가 좋아했던 것은 그대로 두고, 엄마가 봐도 치울 만한 것들은 치우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엄마의 시선으로 다시 집안을 둘러보았다. 버릴 것과 챙길 것들, 희미하던 경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의 장례식 후 지인들은 지쳐 있던 나에게 엄마의 유품은 다 처분하라고 했다. 그리고 요즘 젊은이들처럼 귓불도 뚫고, 유행하는 옷도 사 입고, 이왕이면 화장법도 새것으로 배워서 고지식했던 엄마처럼 살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물론 나에게 주는 그들 나름의 애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피로 맺어져 삼십 년 넘게 엄마의 삶과 가치관을 보고 배우며 살아온 내게, 그것은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엄마의 흔적을 모두 지워버리라는 말로 들렸다. 그들의 '애정'은 나에겐 무례한 오지랖일 뿐이었다.

  

‘유품’이란 단어에서는 주인의 온기가 식어버린 쓸쓸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유산’이라는 말에는 떠난 이의 아름답고 성실했던 삶이 그대로 녹아 있다. 나는 엄마의 많은 것들을 정리했지만 또 많은 것들을 그대로 두었다. 엄마가 보던 책, 엄마 글씨가 빼곡한 공책들, 그리고 좋아했던 소품들, 그 모든 것들은 내겐 단순한 ‘유품(遺品)’이 아닌 ‘유산(遺産)’이다. 그것들을 보고 있으면, 엄마의 따뜻한 숨결과 다정했던 모습이 여전히 내 곁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나는 엄마의 이런저런 상장을 한참 구경하다가 가지런히 모아서 엄마가 정리해 둔 그 상태로 서랍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 토닥토닥 상장이 들어있는 봉투를 다독였다. 엄마는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어낸 나를 보고 역시 내 딸이라며 뿌듯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2016년 에세이문학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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