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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나 Sep 10. 2022

친구 J

          

    J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난 친구로, 가까이 지낸 지 20년이 넘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삶의 반절 이상을 함께 지낸 셈이다. J는 참 무던한 성격이다. 좋고 싫음이 지나치게 확실한 나와는 달리 그는 그저 무난하게 모든 것을 대한다. 그는 내가 좋아할 만한 물건들을 아무렇지 않게 슬쩍 건네주기도 하고, 그의 어머님 역시 당신이 만드신 음식들을 챙겨주시곤 한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받았던 정말 큰 도움은 이런 것에 비할 수가 없다.




 

  몇 년 전 가을의 어느 날. 낮에 시작된 아버지의 척추수술은 밤이 깊도록 도무지 끝이 나질 않았다. 그리고 엄마가 입원했던 다른 병원에서는 환자의 상태가 위독하다며 어서 그쪽 병원으로 와달라는 전화를 여러 번 걸어왔다. 이들의 자식이라곤 오직 나 혼자인 상황에서, 나는 각각 다른 병원에 입원한 환자 두 명의 보호자 역할을 동시에 했어야만 했다. J는 퇴근길에 나를 위해 아버지 수술이 한창인 병원으로 왔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맞이했고, 그는 아버지의 수술이 끝날 때까지 나와 함께 있어줬다.



   아버지의 수술은 자정 즈음에 끝났다. 나는 수술장에서 나온 환자를 챙길 겨를도 없이, 엄마 쪽 병원에서 나를 계속 찾으니 그곳으로 가겠다는 말을 마취에서 갓 깨어난 아버지에게 했다. 어서 가 보라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내 등 뒤에 남기고 서둘러 병실을 나왔다. 그리고 병실 밖에서 나를 기다리던 J에게 나 자신도 놀랄 만큼 무리한 부탁을 하고 말았다. 지금 엄마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가서 밤을 새워야 할 것 같은데, 나 혼자는 너무나 무서우니 같이 가서 있어달라고 말이다. J는 당연하다는 듯이 알았다고 했고, 그 길로 우리는 엄마가 입원했던 병원으로 향했다.



  나와 J는 중환자실 앞, 그 불편한 의자에서 밤을 같이 새웠다. 잠이 들다 깨다를 아무리 반복해도 중환자실 앞 복도의 가을밤은 춥고 길기만 했다. 힘겨웠던 밤을 보내고 맞이한 아침, 집에서 금방 씻고 오겠다는 J에게 나는 혹시 몰라 늘 갖고 다니던 엄마의 사진을 건넸다. 그리고 엄마의 영정사진을 만들어 와 달라는 부탁을 했다. 마음이 내키지 않아 미루기만 했던 일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시간이 없다는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몇 시간 뒤, J는 엄마의 영정사진과 나를 위한 세면도구를 챙겨서 다시 병원에 왔다. 그렇게 또 같이 하루를 보내고 다시 저녁이 되었을 때 나는 J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너무 미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다음 날 깊은 밤, 엄마는 돌아가셨다.



  J는 장례식에서도 내 곁에 있어줬다. 그리고 아버지도 없이, 서먹한 관계의 친척들하고만 가야 했던 먼 거리의 장지에도 내가 같이 가달라고 하자, 그는 역시나 알았다고 했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J에게 무리한 부탁을 연거푸 하고 있었다.





  그 후 2년 반의 시간이 흘렀다. 나와 J는 여전히 같이 밥을 먹고, 수다도 떨고, 성당 미사에도 함께 가고 있다. 나는 외동이라 형제가 없고, 친척과도 친하지 않다. 그래서 그 힘들었던 시간을 외롭게 보내면서, 어려울 때 나를 도와줄 제대로 된 어른하나 없다고 늘 속상해했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내 주변에는 어떤 어른보다 믿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건 바로 친구 J였다.



  사실 나는 나의 죽음에 대해서 종종 생각한다. 엄마의 죽음을 겪으면서 나는 엄마가 진심으로 부러웠다. 엄마에게는 나라는 존재가 있어서, 내가 엄마의 숨이 멎은 그 순간부터 모든 것들을 정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는 내 죽음의 뒷수습을 맡길 수 있는 존재가 아직은 없다. 그리고 앞으로 그러한 존재가 생길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인연이란 인간이 억지로 노력한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나에게 J는 내 죽음을 맡길 수 있는, 아직은 유일한 존재이다. 내가 엄마의 뒷마무리를 정성껏 했듯, J라면 그래도 오래된 친구의 죽음을 아쉬워하며 그럭저럭 내 뒷마무리를 해주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엄마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 내가 그의 성당 대모(代母)가 되어준 것이 오히려 나에게 행운이었던 것 같다. 대모도 어쨌든 ‘어미’이니 그에게는 ‘딸’로서 나를 잘 챙겨야 할 의무가 생긴 셈이니까.



   J와 나는 며칠 후 있을 제천 음악영화제에 갈 계획을 짜고 있다. 음악과 영화에 관심이 많은 J답게 그가 모든 것을 계획하고 있고 나는 그저 동행만 할 생각이다. 그 힘든 시간을 함께 겪어준 친구, 무르익은 여름밤에 음악과 영화 그리고 술 한 잔 편안하게 나눌 수 있는 친구. 이런 존재가 내 곁에 있는 것을 생각하면 내 성격이 어떠하든, 나는 생각보다 괜찮은 인간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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