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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나 Aug 29. 2022

장애

나는 그들의 ‘배려 없음’이라는 '장애'에 분노했다



의사가 아버지에게 이야기했다.



“환자분 상태라면 아마 장애등급 6급 정도는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본인이 장애등급 대상자인지 모르셨죠?”


아버지와 나는 얼떨떨했다. 아버지가 몇 달 전 척추수술을 받았고 그 회복 때문에 몸살을 종종 앓긴 하지만, 아버지에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장애’가 있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요즘도 아침저녁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고, 주말이면 화단도 열심히 가꾸고 있다. 수술 전과 후, 아버지의 생활은 변한 게 없는데 장애라니. 아버지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니 눈빛에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의사는 동사무소에 제출할 서류들을 작성해 주겠다며, 진료실 밖에서 잠시 기다려달라고 했다. 우리는 그제야 아버지가 꽤 심각하게 아팠고, 몇 달 전의 수술도 상당히 큰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사실, 나에게 ‘장애’란 단어는 낯설지 않았다. 아니, 낯설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에 대해 무척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얼마 전까지 장애인의 보호자였다. 내가 보호해야 했던 장애인은 엄마였고, 엄마는 돌아가시기 직전 ‘뇌병변 2급’의 장애를 갖고 있었다.




평생 큰 병 한 번 걸리지 않던 엄마는, 겨우 나이 60이 넘자마자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병에 걸리고 말았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그 영민하던 엄마의 머릿속에 암 덩어리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열네 시간의 수술, 그리고 1년 동안 지루하게 이어진 방사선과 항암치료. 시간이 쌓일수록 우리 가족은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단 1분 1초도 엄마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시간. 엄마를 혼자 두고 집 앞 슈퍼에 가는 것조차 나에겐 꿈같은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을 아버지와 나, 둘이서 짊어지기엔 아무래도 무리였다. 이건 애초에 개인의 힘만으로는 이겨낼 수 없는 일 같았다. 중한 환자에게는 분명히 나라의 보조가 있을 듯했고, 그러다 찾아낸 것이 장애등급 제도였다.


장애등급이 높으면 높을수록 혜택이 많으니, 나는 엄마의 현재 상태를 보여줄 수 있는 많은 서류들을 떼러 이 병원에서 저 병원으로 다녔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더 나은 상황에서 투병과 간병을 하기 위한 노력. 그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엄마가 갖고 있는 다양하고도 복합적인 장애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국가의 공권력을 통해 확정하는 작업이었다. 병원에서 받은 서류에는, 이 사람이 아프기 전엔 어떠한 심성을 갖고 있었으며, 사회에 어떠한 업적을 세웠는지,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얼마나 자랑스럽고 치열하게 살아왔는가 하는 내용은 단 한 줄도 없었다. 다만 지금 운동과 인지, 언어 능력이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저하되어 있으며, 따라서 일상생활을 혼자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지극히 냉정하고도 객관적인 내용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가족에게는 천진난만하지만, 밖으로는 자존심이 강한 엄마. 아무리 딸이지만  내 멋대로 엄마의 장애등급을 받아도 되는가. 내가 엄마의 자존심을 짓밟는 것은 아닌가.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확정’ 받는 것에 대해 엄마는 얼마나 가슴 아파할까. 과연 나는 지금 옳은 일을 하고 있는가. 서류 준비를 하면서, 내 머릿속은 미묘한 고민들로 가득 찼다. 마치 모래 속에 숨어있는 사금(砂金)을 찾아내는 것처럼, 경계가 불명확한 것들을 나는 명확하게 가려내야만 했다. 나는 엄마의 마음까지 돌보고 싶었다. 그건 이 세상에서 엄마를 가장 잘 아는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마어마한 서류와 MRI 영상물 양 때문이었는지, 엄마의 장애등급 판정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한 달 여 후 엄마의 결과가 나왔다. 장애인에게 발급되는 ‘복지카드’에는 엄마의 사진이 있었고, 그 옆에는 엄마의 이름과 ‘뇌병변 2급’ 이란 말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잘된 일이었다. 2급이면 등급이 높은 편이니 여러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모멸스럽기도 하고 낭패스럽기도 한 묘한 기분. 아, 엄마가 결국 장애인이 되어버렸구나, 그 쓸쓸함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까.




어쨌든 그 덕분에 우리는 편의를 볼 수 있었다. 엄마의 휠체어를 싸게 살 수 있었고, 장애인 택시도 이용할 수 있었다. 또 집의 전기와 가스비, 전화비의 소소한 할인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엄마 본인에게 장애등급이 나왔다는 말은 여전히 하지 못했다. 엄마가 가슴 아파하고 절망할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미루기를 몇 달, 엄마가 우연히 ‘복지카드’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타 지역의 장애인 택시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복지카드를 제시해야만 했는데, 그것이 엄마의 눈에 띈 것이다. 엄마는 그게 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침착하게 이야기했다. 휠체어를 산 것도, 이렇게 장애인 택시를 이용할 수 있는 것도 모두 그 덕분이라고. 그런데 엄마는 평온한 표정으로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그래? 그랬구나. 어쩔 수 없지 머.”


사실 그 ‘장애등급’ 하나가 엄마의 모든 정체성을 대표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장애’라는 그 한 단어 때문에 그토록 슬퍼했던 것이다. 투병으로 비록 말이 어눌해져도, 그리고 거동이 편하지 않아도 엄마는 여전히 나의 엄마였고 내게는 자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치료 때문에 짧아진 머리카락과 뭔가 변한 듯한 모습에 몇몇은 엄마에 대해 쉽게 말을 해 댔다. 그리고 그 말이 돌고 돌아 다시 내 귀로 들어왔을 때, 나는 그들의 ‘배려 없음’이라는 '장애'에 분노했다.




아버지는 의사의 말대로 척추장애 6급이 나왔다. 수술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허리가 덜 굽혀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몇 도가 덜 굽혀지든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복지카드’가 발급됐을 때 나는 서글퍼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며, 엄마의 남편이라는 사실, 그리고 성실하고 온화한 사람이란 정체성은 변함없으니까.

아버지의 장애등급으로 전화비 할인신청을 하고 그 이야기를 전했더니 아버지가 좋아하며 한 말씀하신다.

“응, 그거 참 잘 됐네!”




2015년 <수필과 비평>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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