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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나 Aug 26. 2022

슬픈 깨달음

나는 너의 고통과 외로움, 두려움을 완벽하게 알 수가 없다

   사랑니는 생각보다 제법 컸다. 사랑니의 뾰족하고 긴 뿌리는 약간 휘어진 채 공중을 가리키고 있었고, 본디 하얀색이었을 이와 잇뿌리는 빨강도 주홍도 아닌 오묘한 핏빛으로 곱게 물들어 있었다. 왼쪽 뺨과 혀의 왼쪽, 그리고 식도의 왼쪽까지 얼얼한 그 상황에서도 나는 몹시 궁금했다. 어떻게 생긴 것을 지금까지 잇몸에 박은 채 살아왔는지. 뽑은 제 사랑니 좀 보여주세요. 나는 지혈용 거즈뭉치를 잔뜩 문 채, 웅얼거리며 말을 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순간, 이상하게도 엄마의 우뇌 측두엽에 자리잡고 있던 암덩어리를 떠올리고 말았다.



   2년 전, 엄마는 수술장에 들어가기 직전 침대에 누워서 나에게 뽀뽀를 해 달라고 했다. 평상시의 나였다면 수도 없이 엄마의 뺨과 입술에 입맞춤을 해주었겠지만, 그 때의 나는 엄마와의 입맞춤도, 엄마의 손을 잡는 것도 애써 참고 있었다. 엄마의 청을 듣고서야 못 이기는 듯 아주 짧은 입맞춤을 해 줬고, 담담하게 말했다. 엄마 잘 갔다 와. 나는 두려웠던 것이다. 수술장 앞에서의 어설픈 인사가 영원한 인사로 되어버릴까 봐.



   치과 의자에 붙어있는 전등은 내 얼굴에 날카로운 빛을 뿜어댔다. 나는 그 불빛을 얼굴 전체로 맞으며 갑작스러우면서도 때늦은 후회를 했다. 2년 전 그 때, 좀 더 다정하게 엄마와 얼굴을 쓰다듬어 줄 걸. 엄마는 이런 불빛에 자신의 머리를 내줬던 것이구나. 수술이나 입원을 해보지 않은 나로선 내 두려움만 앞섰지, 환자였던 엄마의 마음은 미처 헤아릴 수 없었다.



  이윽고 마취주사의 바늘은 내 잇몸과 뺨의 안쪽을 깊게 파고들었고, 내 살은 적당히 얼얼하면서도 무감각해졌다. 침을 삼키는 것마저 어색할 정도로 서서히 목의 왼쪽근육이 둔해졌다. 마취약의 놀라운 힘에, 혹은 인간 몸뚱이의 하찮음에 감탄할 무렵, 의사가 내게 말했다. 뺨이 얼얼하죠? 자, 입 크게 벌리세요.



  의사는 둔탁한 집게로 문제의 사랑니를 잡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마치 나사를 잡고 있는 펜치를 다루듯 집게를 왼쪽으로, 그리고 오른쪽으로 살살 돌렸다. 내 사랑니도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의료도구들의 딸그락거리는 소리와 마취되지 않은 반대쪽 뺨, 그리고 혀의 느낌으로 내 입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대략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의 그곳은 전혀 아프지도 않았다. 내 몸인데 내 것이 아닌 듯, 사랑니가 있는 그 곳은 이미 내 감각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의사는 한 손으로는 내 턱을 세게 잡아 움직이지 않게 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열심히 집게를 돌리고 있었다. 한참을 애쓰던 그는 말했다. 뿌리가 약간 휘었는데도 쉽게 잘 빠졌습니다.



  치과의자 위 전등빛 속에서 엄마를 떠올리기 시작한 나는, 의사가 내 사랑니와 씨름할 때도 계속 엄마를 떠올리고 있었다. 엄마가 수술장에 들어간 직후부터 마취에서 깨어날 때까지, 그 긴 시간 동안 엄마가 느꼈을 마음과 몸의 감각을 다 알고 싶었다. 내가 치과 의자 위에서 이 모든 것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나는 알 수 없었고, 앞으로도 알 수가 없다. 엄마와 나는 그 누구보다 가까운 모녀였지만, 나는 엄마가 아니며, 엄마는 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 모녀는 서로의 인생에서 딱 한 번, 심한 갈등을 경험했다. 집안의 복잡한 일로 엄마는 나에게 감정적 의지를 해 왔고, 나는 그 때 석사 논문의 재심사를 앞두고 있었다. 이불 위에서 제대로 자는 것이 사치로 느껴질 정도로 나는 갈급했었다. 만약에 이번에도 심사를 통과하지 못한다면, 그 후의 내 삶은 도무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뛰어난 동료들 틈에서 나는 내 머리의 아둔함에 괴로웠으며, 끔뻑이며 원고 입력을 기다리던 커서가 공포스러웠다. 내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리 안에는 엄마의 감정을 담을 공간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청을 했다. 엄마, 논문 준비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나 좀 도와줘요. 그러자 엄마는 답했다. 너는 힘들어도 알아서 잘 하잖아.



  그것은 자식에 대한 믿음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때의 나에겐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자식의 고통은 헤아리지 못하고 본인의 감정만 돌보아 달라는 이기심으로만 느껴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 차가워졌고 엄마를 멀리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슬퍼하고 괴로워했다. 그 후 몇 년 뒤, 엄마는 늦은 공부를 시작하고 석사논문을 준비하게 되었다. 엄마는 새삼스레 말했다. 네가 논문 준비할 때 참 힘들었겠구나. 내가 해 보니까 알겠다. 엄마의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마음을 다시 열었고, 엄마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엄마도 경험하지 않으면 모르는 게 있지. 엄마도 사람인 걸.



  그런데 나는 엄마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엄마가 얼마나 두려웠으며,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를 깨달았다. 사랑니를 빼는 간단한 치료와, 엄마가 목숨을 걸고 받았던 그 수술을 비교하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한가.



   신은 자신의 모습처럼 인간을 만들었다한다. 하지만 인간은 결국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이다. 그래서 나는 너의 고통과 외로움, 두려움을 도무지 완벽하게 알 수가 없다. 이 뒤늦은 깨달음에 나는 슬퍼한다.           



2016년 <그린에세이> 1,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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