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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나 Aug 27. 2022

경계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었다

  죽음과 삶은 연속적이었다. 죽음은 며칠을 두고 천천히 조금씩 찾아왔으며, 죽음과 삶의 경계는 알면 알수록 모호했다. '죽었다' 라는 말보다 '죽어간다'라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엄마의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지면서, 엄마는 일반병동에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엄마가 호스들을 주렁주렁 달고 중환자실에 있었던 2박3일의 시간을, 나 역시 병원에서 보냈다. 유리문 하나를 사이에 둔 채, 엄마는 침대 위에 있었고 나는 보호자용 의자에 마구 구겨진 종이처럼 던져져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생애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환자의 상태는 상당히 위험했다. 그랬기 때문에 의료진은 더욱 보호자가 병원 건물 안에서 대기하고 있길 원했다. 사실 그들과 나는 환자가 혼자 다시 숨을 쉬고 의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숨이 멈추게 될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었다. 그 순간이 예상보다 하루 늦춰지더니 엄마에게 투여되던 혈압강화제를 보호자인 내 동의 하에 중지했는데도 또 하루 가까이 늦어지고 있었다.

하루에 두 번 있는 중환자실의 면회시간, 그리고 중환자실에서 나를 수시로 긴급 호출할 때, 나는 재빨리 중환자실에 들어가야 했다. 엄마는 이미 자가 호흡이 멈춰진 상태였고 다만 호흡기가 엄마의 폐를 일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엄마의 가슴은 기계적으로, 정말 기계적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중환자실로 옮겼을 때와는 달리, 하루가 지나고 이틀 가까이 지나자 엄마의 입술과 엄마의 이마 색깔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리고 발도 서서히 차가워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언가 안타까워 엄마 발과 손을 열심히 주물렀다. 그러면 엄마의 몸과 연결된 모니터에는 맥박과 혈중산소농도 수치가 약간 올라갔다. 사람 몸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병원에서 맞이하던 둘째 날 밤 10시. 중환자실에서 나에게 급히 전화가 왔다. 엄마가 돌아가실 것 같으니 어서 중환자실로 들어오라는 말이었다. 이틀 전에 척추수술을 받아 역시 입원 중이었던 아버지와, 친한 선배언니에게 급하게 전화를 하며 나는 중환자실로 뛰어갔다. 엄마는 몇 시간 전에 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특별히 뭐가 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의사와 간호사는 엄마가 지금 막 돌아가셨다 했고, 그러니 기도삽관을 했던 호흡기와 엄마 몸에 연결된 여러가지 기계들을 제거하겠다고 했다. 보호자는 할 것이 많았다. 환자의 정보가 기록되어 있는 컴퓨터의 모니터를 보며 엄마의 주민등록번호와 주소 등을 세밀히 확인해야했으며, 장례는 어디서 치룰 것인지를 설명해줘야 했다. 그리고 숨이 끊긴 환자지만, 그래도 퇴원 수속은 어떻게 해야하는지 그들로부터 설명을 들어야했다.

   

  나는 장례를 치루기로 되어 있었던 성당에 전화를 해서 엄마의 임종을 알렸고, 엄마의 병원비를 응급실 원무과에서 결제했다. 나는 모든 것을 참으로 고요하고 차분하게 처리해냈다. 울지도 않았고, 당황하지도 않았다. 내게 슬픔보다 더 컸던 감정은, 엄마의 임종을 지켜본 유일한 보호자로서, 이 모든 과정을 정확하고 깔끔하게 처리해야한다는 책임감이었다.

나는 한밤 중에 날아오다시피 한 선배언니, 그리고 하얀 천으로 덮여진 엄마와 함께 영구차를 타고 성당으로 향했다. 나는 병원의 모든 일을 혼자 잘 마무리한 것에 크게 안도했다. 다행이었다, 엄마에게는 내가 있어서.

 

   엄마가 눈에 띄게 말을 하지 못하고, 의식이 없어지는 과정을 나는 두세 달 동안 지켜봐 왔다. 그러니 임종한 순간의 엄마 모습은 나에게 크게 낯설지 않았다. 그런데 성당 장례식장에서 엄마를 유리 너머로 봤을 때 나는 느꼈다. 아, 죽음이란 저런 것이구나. 채 한 시간도 안 되는 동안, 흰 천에 쌓여져 있던 엄마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엄마의 팔에는 이미 멍 같은 파란색 반점이 가득했다. 엄마는 완전히 떠난 것이었다. 책임감으로 꽁꽁 묶여있던 슬픔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내렸다.

 

   한국 사람들은 세계 어느 나라의 사람들보다 '새해'라는 것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해가 바뀌면서 모든 사람의 나이가 함께 바뀌는 건 아마 한국 밖에 없는 듯하다. 그러나 연도가 바뀌고 나이에 숫자 1이 더해져도 나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영속적인 이 시간의 흐름을 굳이 나눠놨다는 것에 나는 차라리 비웃음을 던지고 싶다. 삶과 죽음이라는 그 엄청난 것의 경계가 이토록 옅은데, 무엇을 나눈들 그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사는 건 참 별 볼일 없는 것이다. 그 동안 참 많은 것들에 설레어하며 살아왔는데, 그것들의 색깔이 다 바래졌다. 이제 겨우 30년을 조금 넘게 살았을 뿐인데 첫눈도, 새해도, 크리스마스 트리도, 연둣빛 새싹도, 해바라기도, 그 외에 그 어떤 것도 나에게는 회색으로 보인다. 일흔이 넘으신 아버지는 자기의 딱 반을 살아온 딸에게 한마디 건넨다. 원래 그런 거야, 나이 먹으면.




2017년 <그린에세이> 3,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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