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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나 Sep 05. 2022

엄마의 머리카락

엄마의 그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나와 아버지는 좋아했다

  눈을 떴다. 내 옆에서 같이 잠들었던 선배 언니는 어느새 출근을 하고 없고, 방에는 나 혼자뿐이다. 새벽녘에 나가면서, 오늘 일 잘 치르라던 선배 언니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방문 너머로 강아지 뚱이의 발소리가 들린다. 딸각딸각. 이 집에 나 말고, ‘생명’이라는 존재가 하나 더 있었구나. 이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사한 일이다. 어제 나에겐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그럴 것이다. 어서 일어나야 하는데. 몸이 쉽사리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때, 엄마가 사용하던 가발이 눈에 들어왔다. 아, 저걸 갖고 가야겠구나. 어차피 엄마 것인데. 이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해낸 나 자신이 기특했다. 나는 서둘러 엄마의 가발을 챙기고, 옷을 입었다. 검은색 상복. 파리한 얼굴.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이 어색했다.




   


   엄마는 항상 길게 머리를 길렀다. 엄마의 그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나와 아버지는 좋아했고 나이가 들어도 엄마의 머리숱은 여전했다. 그 긴 머리는 엄마에게 참으로 잘 어울렸다. 엄마의 전담 미용사였던 나는 엄마가 외출할 때면 분홍색 헤어 롤로 엄마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말아 올렸다. 그리고 드라이기의 뜨거운 바람을 머리에 쐬어주면, 엄마의 머리에는 우아한 물결이 흘러내렸다. 그것을 반쯤 묶고 나서는 엄마의 뒷모습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그랬던 머리카락을 다 잘라내야 한다고 했다. 개두술 중 염증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게 의사의 말이었다. 어찌할 바 모르는 우리 모녀에게 의사는 우리보다 더 어찌할 바 모르는 얼굴로,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병원 지하에 미장원이 있어요. 내일 수술이니까 오늘 중에는 다녀오셔야 해요.”



   병원 안의 미장원은 동네에서 보던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파마를 하거나 염색을 하러 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신, 그곳 손님들은 대부분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건 그냥 자르는 것이 아니라 빡빡 밀어내는 작업이었다. 노리끼리한 얼굴에 배냇머리처럼 솜털 머리카락을 한 젊은이도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 남자, 젊은이 할 것 없이 그들은 머리를 밀었다.



   엄마의 길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졌다. 후드득, 후드득. 난 울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아픈 엄마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아, 엄마의 그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저렇게 없어지는구나. 나는 눈이 새빨개지도록 울었다. 하지만 엄마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도 않고 나를 가리키며 미용사에게 절규하듯 이 말만 했다.



“선생님, 쟤 울어요. 쟤 계속 울어요. 쟤 울지 말라고 해 줘요.”



어쩌면 그때 엄마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여린 성격의 엄마가 멀쩡한 정신으로 이 잔인한 일을 겪어내기란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용실 직원들은 나를 달래고 또 엄마를 달랬다.



“이거 머리 짧게 잘라내는 것, 아무것도 아닙니다. 금방 또 자랄 거예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열네 시간의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며칠 후 엄마는 가발을 샀다. 그 사이 엄마의 머리카락은 까칠까칠하게 제법 나기 시작했지만, 엄마는 가발을 꼭 사고 싶어 했다. 가발은 생각보다 꽤 비쌌다. 하지만 그걸로 엄마가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겐 의미가 충분했다.



   우리는 그 후로도 몇 번 미장원에 들러 엄마의 머리카락을 밀었다. 예쁘게 나는 듯했던 머리카락이 방사선 치료 때문에 듬성듬성 빠졌기 때문이다. 첫 ‘이발’ 때는, 끝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우물 속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 이발은 결정도 금방이었고, 감정적으로도 아무렇지 않았다. ‘사람이 낫는 것이 중요하지, 그깟 머리카락이 뭐라고 그렇게 울었을까’라며, 나는 몇 달 전의 나를 부끄러워했다. 머리카락을 아쉬워하며 우는 것조차 우리에겐 사치였을지 모른다.



  그 후 1년 남짓한 시간. 우리는 행복했다. 힘든 투병이었지만 엄마도, 그리고 우리 가족도 그 생활에 적당히 익숙해졌고, 무엇보다 엄마의 병세가 회복되는 듯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버지와 내가 밥은 챙겨 먹었는지 걱정을 했고, 우리는 엄마 손을 붙들고 이야기도 하고 얼굴에 뽀뽀도 하며 지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그리 길진 못했다. 추석을 쇠기 위해 송편도 부침개도 준비해놨던 날 오후, 엄마의 상태가 급속하게 안 좋아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와 나는 추석날 밤을 병원 응급실에서 보냈다. 의사는 조심스레 우리에게 물어왔다. 뇌에 수종이 심한데, 물을 빼서 압력을 낮추면 환자의 의식이 조금이라도 선명해질 수 있을 거라고. 병의 속도는 늦추지 못해도, 가족들과 한 번이라도 더 눈 맞출 시간은 벌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그것은 션트 수술이라고 했다. 항암치료도 끝나고, 병세도 나아져서 그나마 1년간 유지했던 엄마의 커트 머리를 다시 밀어야 했다. 그러고 나서 몇 달을 견딘 엄마는, 수술 자국에 반창고를 붙인 채 돌아가셨다.





   가발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자정 무렵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엄마를 성당 장례식장으로 모실 때까지 선배 언니는 나와 함께 해 줬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날, 아버지는 예상치 못했던 수술을 하셨다. 나이 탓에 생긴 병이긴 했지만, 아버지의 척추는 수술을 당장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아버지 본인도, 그리고 나 역시 몰랐다. 아버지의 허리가 그 정도였다는 것을. 그동안 우리의 모든 것이 엄마에게로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혼자 이 모든 걸 치러야 했다. 언니는 그런 나를 혼자 둘 수 없다며 우리 집에 같이 있어 준 것이다.



    염을 해 주는 분들에게 가발을 건넸다. 그들은 묻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발을 쓴 엄마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예뻤다. 엄마! 하고 부르면 금방이라도 일어날 듯, 참으로 평온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엄마가 내게 마지막 부탁을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발을 챙겨달라고. 소름 끼치게 쓸쓸했던 그 아침, 내가 그것을 들고 나온 건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엄마가 어렸을 적, 힘들게 살림을 꾸려야 했던 외할머니는 커다란 재단 가위로 자식들의 머리카락을 직접 잘랐다고 했다. 엄마는 그 깡충하고 삐뚤빼뚤했던 머리카락이 너무나 싫었다고 했다. 예쁜 것과 고운 것을 좋아했던 엄마. 하지만 착한 딸이었던 엄마는 외할머니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고, 그것이 한이 되어 평생 머리를 길렀던 것일지도 모른다.



   엄마가 쓰던 많은 머리핀은 서랍 안에서 여전히 반짝이고 있다. 엄마 머리핀을 꺼내 내 머리에 꽂아 본다. 마치 엄마와 함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2015년 수필미학 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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