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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 Dec 21. 2020

서툰 편지

만수무강하세요.



조손가정인 조카들에게 신경을 쓰기 시작한 지 한 2달 정도 되어간다.

(큰아빠도 못 이기는) 무서운 큰엄마 컨셉으로 살아온 지 13년이라 아이들에게 숙제를 내주면 꼭! 해온다.

10문제 중 8문제를 틀려와도 혼내지 않는다.

다만, 숙제를 안 해오거나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무섭게 혼낸다.

6학년짜리 큰애도 문제집 한 권을 모두 풀어본 적이 없을 만큼 신경 써주는 사람이 없었고,

그랬기에 아이들은 숙제가 있는 이 상황이 갑갑하고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쩌겠나... 큰엄마는 무서운데... 하는 데까지는 해야지.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는 10분도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던 녀석들이 이제는 제법 집중도 한다.


큰애와 둘째는 얌전하고 평범한데 반해, 막내 녀석이 요주의 인물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여기저기서 요 녀석 얘기가 자주 들려왔었고, 나름 유명인사다.

전에 쓴 군기반장 큰엄마와 말썽꾸러기조카  에서도 얘기했듯 학교에서도 버거워하는 친구였다.


코로나 19로 인해 이른 방학식을 했는데,

선생님께서 선물과 정성스러운 카드를 써주셨길래, 답장을 써서 사진으로 찍어 보내드리자고 하니

쑥스러워서 싫다고 한다.

그래도 편지를 받았으면 답장을 해야 한다고 얘기하니 아주 정성스럽게 글을 써 내려간다.

써본 적 없는 편지에 "뭐라고 써요. 할 말이 없어요."를 연발하더니 약간의 도움을 받아 써 내려갔다.

옆에서 보니 여간 기특한 게 아니다.

근데, 마지막에 만수무강하세요.라고 쓰는 걸 보고 웃음이 빵~ 하고 터졌다.


사진을 찍어서 선생님께 문자로 보내드리니,

선생님도 만수무강에서 피식 웃으셨다며 장문의 감사인사가 답장으로 왔다.

선생님의 따뜻한 눈길이 아이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가 함께한 두 달 만에 아이는 많이 좋아졌다.

전에는 조용하라는 말을 수도 없이 했었는데, 지금은 3시간 동안 3,4번으로 끝나는 것 같다.

똘똘해서 말귀도 잘 알아듣고, 의욕을 보일 때마다

오버스런 칭찬과 함께 머리를 헝클어주는게 전부인데도 아이는 내게 벽을 조금씩 허물어준다.

답장을 쓰자는 내 의견에 큰 반항 없이 몇 글자 써준 것만으로도 우린 많이 가까워진 것이다.

전에 친구에게 사과편지를 쓰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안 쓰겠다고 고집을 부리길래

저쪽 방에 가서 조용히 생각해보고 쓰고 싶은 말을 써오라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방 한쪽 벽에 누가 봐도 막내 조카 글씨체로 낙서가 되어있었다.

개빡쳐


며칠이나 지나서 그 낙서를 보고 딸들하고 얼마나 웃었는지...

한동안 우리 집 유행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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