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사의 불안일기
친구들끼리 이런 얘기를 종종하곤 한다.
"난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이대로 나이 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때가 좋았는데."
누가 나에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데, 가겠냐고 제안해온다면 나는 단호히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할 것이다.
나이를 먹어서 아프고, 슬픈 것보다 나이를 먹어서 더 편해진 것이 많기에. 물론, 아직 나이를 덜먹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내가 살아왔던 세상은 어리고, 젊은 여자들에게 그리 좋은 세상이 아니었기에. 물론, 누군가는 모두 다 힘들었다고 말하겠지만, 내가 버텨온 환경이 나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웠기에 하는 이야기다.
조금씩 환경이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베이비 시팅 알바를 하면서 내가 본 모습은 조금 비관적이었다. 3,4살 된 남자 아이들에게는 공룡과 로봇 장난감을 한 박스씩 사주고, 여자 아이들에게는 인형과 주방 놀이를 사주는 것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 아이들에게는 정말 선택권이 있었을까? 또, 분명 똑같이 행동하는 데도 아이들의 성별에 따라 부모님의 반응이 달랐다. 남자 아이들은 뛰고, 선생님을 타 넘고, 소리를 지르는 데도 관대한 반면, 여자 아이들에게는 금방 제지가 들어갔다. "그러지 마. 하지 마. 얌전히 놀아."라고.
아직도 나는 화가 남아있는 것 같다. 나의 겉모습만 보고 나에게 벌을 주고, 무안을 주고, 그러면서도 그게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던 선생님들의 그 눈빛에. 나는 그저 꾸미는 것을 좋아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하고, 아이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그런 아이였는데. 외고 선생님들은 그런 나를 미운 오리 새끼처럼 바라본 것 같다. '쟤는 왜 저래?' 그런 느낌. 그래서 나는 나에게 벌을 주었다. 치마를 늘리고, 머리를 그냥 아무렇게나 기르고, 화장도 하지 않고, 얌전히 공부만 하는 청순한 여자아이로. 그게 내 모토가 되었으니까.
지금 학생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학교를 다닐 때는 나는 항상 '어떠어떠한 김윤아'였다. 학창시절에는 그게 나를 우러러보는 것 같았고, 그래서 좋았다. 그게 나를 옭아맨다는 것도 모른 채로. 나는 여자였고, 어렸고, 평가가 익숙했으니까.
나에게는 아직도 선명한 순간이 있다. 까만색 두툼한 롱패딩을 입고, 모자를 쓰고 지하철에 탔을 때의 그 느낌. 나의 몸도 얼굴도 성별도 누군가가 판단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그저 나를 '사람'으로 보는 느낌. 그게 너무 좋았다. 짜릿할 정도로 좋았다. '아, 이제 내가 누군지 신경 쓰지 않는구나. 나를 더 이상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구나.'
내가 너무 민감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건 지극히 내가 겪었던 개인적 의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단 한순간도 어려지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