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사의 불안일기
부모님의 비난과 무관심으로 입을 닫아버린 이후, 할 얘기도 안 할 얘기도 아무 얘기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힘들어도 괜찮은 척, 아파도 안 아픈 척, 어차피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혼자 슬프고, 혼자 아프고, 혼자 힘들고, 혼자 괴로워서 너무 외로웠다.
아파서 바닥을 뒹굴면서도 "나 아파."라는 얘기도 하지 못했고, 정말 죽을 것 같이 아플 때에만 안방으로 겨우겨우 가서 말을 꺼냈다. 내 방에서 안방 사이의 거리가 너무나도 멀어 보였다. 그래서 항상 부모님을 원망했다. 어떻게 딸이 이렇게 아픈데 저렇게 무관심하지. 어떻게 딸이 다음날 시험을 보는데 부모가 돼서 나는 신경도 안 쓰고 싸울 수가 있지. 어떻게, 어떻게 저러지..
내가 힘이 생긴 건지, 세월이 흐른 건지, 부모님이 약해지는 모습에,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에 맘이 놓인 건지 어느 순간부터는 조금씩 내 얘기도 하고, "그땐 진짜 힘들었어."라고 웃음을 섞어 힐난도 해보고. 그러면서 부모님이 하는 '그때는 나도..' 하는 이야기가 비로소 들렸다. 그려졌다.
중학교 때 우리 집에 불이 났을 때, 엄마가 모든 일 처리를 다 하고, 나는 충격에 아파서 친구 집에 쓰러져 있을 때, 나는 우리 아빠가 항상 중요한 순간에 없다고만 생각했다. 아빠는 항상 바쁘니까, 가족에게는 무관심하고. 그리고 지금에서 오빠가 아빠의 일을 이어하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아빠의 젊은 모습이 보였다. 이 공장, 저 공장 다니면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책임감에 허덕이는 모습.
나는 우리 엄마가 항상 신경질적이어서 싫었다. 툭하면 기분이 안 좋아서 엄마 눈치를 봐야 했고, 분노의 화살이 혹시나 나에게 올까 두려웠다. 그러다 오빠가 출장을 멀리 가고 나랑 동갑인 오빠의 아내가 혼자서 한 달을 있어야 한다는 걸 얘기하다가, 엄마가 "나는 정말 그럴 때가 많았어. 네 아빠 출장이 젊을 때는 진짜 많았잖아. 그래서 어린 너희를 안방에 데리고, 안방에 잠금장치를 설치해서 거기서 문 다 잠그고 잤지. 무서워서." 그제야 엄마의 젊은 시절이 그려졌다. 안 그래도 불안함이 많은 엄마가 타지에 혼자 시집와서, 아는 사람도 없고, 의지할 남편은 자꾸 집을 비우고, 그래도 혼자 오빠와 나를 지킨다고 같이 재우는 모습.
내가 오만했다. 물론 내가 아픈 건 아픈 게 맞지만, 나는 나만 아프다고 생각했다. 나만 힘들다고, 그래서 너무 외롭다고. 나를 봐주지 않는 부모님을 원망하면서. 그들은 너무 바빴고, 정신없었고, 하루하루 살기 힘들었고, 그래서 힘들다고 얘기하지 않으면 봐주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제야 이해가 간다. 아팠던 나도, 자신이 불행해서 자식에게 고운 말을 할 수 없었던 엄마도, 상냥하고 친절한 말은 평생 들은 적이 없고 장남과 아버지라는 책임감에만 치여 살아왔던 아빠도, 물론 그 사이에서 감정 표현이라고는 못했던 오빠까지도.
나만 힘든 게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힘들다고 말하기로 했다. 그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너무 지쳐서 내가 잘 지내겠거니 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않다고, 나는 이래서 힘들고, 저래서 아프다고. 그러니까 도와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