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사의 불안일기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고등학교 때 친구로 지금도 종종 연락해주는 게 고마운 친구이다. 나는 좀처럼 친구들에게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다. 친구들이 서운해한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적도 있다. 그러나 연락을 할 기운도 없고,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런 악의도 없는, 그러나 때로는 너무 잔인한 살쪘네, 살 빠졌네, 예뻐졌네 같은 얘기를 들을 자신이 없다. 혹시나 살이 쪘다거나 그런 낌새로 얘기하면 나 자신이 와르르 무너져 버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식사 규칙이 깨져버리는 것도 너무 싫다. 나는 하루에 1200kcal보다 적게 먹어야만 하는데, 식사 자리에서는 무엇을 먹을지도 모르고, 또 그걸 먹고 나면 집에 가면서부터 하나씩 먹을 것을 사서 집에 가서 마구 먹어버릴지도 모르니까. 극과 극이다. 안 먹거나 막 먹거나.
그래도 매번 거절을 하기는 어려워 친구를 만났다. 나는 누가 봐도 지친 기색이 역력한데 친구는 한창 대학생활이 즐겁고 재미있는지 화장도 쨍하고, 얼굴도 핀 것 같다. '쟤가 나보다 예쁜가?' 머릿속으로 비교하기 바쁘다. 친구는 이런 내 마음은 모른 채로 종알종알 대학 생활 얘기를 늘어놓는다. 우리는 얘기를 나누며 내가 다니는 학원 근처에 있는 돈가스 집으로 갔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나는 머릿속으로 내가 먹을 돈까스의 양을 미리 정해 놓는다. 한 덩이에 5-600kcal 될 테니... 이때부터 머리가 복잡하다. 산수 계산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침에 고구마 200g을 먹었고, 점심에 300kcal쯤 먹었고, 나오기 전에 커피우유 하나를 마셨으니.. 7조각 중에 4조각만 먹어야겠다. 휴. 정해 놓으니 맘이 편하다. 이제 다시 친구가 하는 얘기가 들린다. 남자친구가 어쩌고저쩌고, 고등학교 동창이자 대학 동기이기도 한 희정이가 요새 연애를 하는데 어쩌고저쩌고. 나는 거기에 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나도 지금 그 대학 다닐 수 있는데. 나도 너네처럼 예쁘게 꾸밀 수 있는데.' 이런 모난 감정만 삐죽 튀어나온다.
"너 왜 이렇게 조금만 먹어"라는 친구의 걱정 어린 말을 뒤로 한 채 우리는 가게를 나왔다. 친구가 자기는 대학생이라고 아르바이트를 한다며, 저녁을 사겠다는 말도 그리 달갑게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저녁을 계획대로 먹은 것에 만족했다. 그리고 카페에서는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데 정신을 쏟았다. 커피는 별로 당기지 않고, 저녁이라 마시기도 싫었다. 친구는 별생각 없이 유자차를 마시겠다고 했다. 달아서 칼로리 계산도 하기도 무서운 유자차를 너무 아무런 고민도, 지체도 없이 고르는 것이 부럽다 못해 시기까지 났다. 그런 마음도 잠시, 나는 녹차라떼를 마실까 말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녹차라떼는 한 잔에 250kcal인데... 아침, 점심 합쳐서 550. 우유가 200 저녁은 350-400 정도니까.. 반 잔만 마시면 되겠다.' 나는 결국 녹차라떼 한 잔을 다 마시지 않았다. 마시지 못했다. 반 잔을 마시고, 더 마시고 싶었지만, 애써 내 욕구를 달래가며 거기서 멈췄다. 숫자 계산을 하고 있는 내가 싫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나도 친구 얘기를 듣고 싶었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