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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원 May 20. 2021

나에게‘테피티의심장’은 무엇인가?

14. 모아나

생명의 여신인 테피티에게

심장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심장을 잃은 테피티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암흑이 도래하기 시작했지.”


_ 모아나 할머니 <모아나>


Q. 나를 나답게 하는 본질, 나에게 ‘테피티의 심장’은 무엇인가요?

A. 테피티는 심장을 잃고 테카로 변한다. 정말 불같이 화난 모습이다. 테피티는 자신이 심장을 잃고 테카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변하고 나서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리고 테카는 왜 심장을 가져오는 모아나를 다가오지 못하도록 거부했을까? 테피티가 생명의 여신으로서 세상을 꽃피우고 동식물들을 살게 하는 것을 온전한 의지로 하고 있었을까? 마우이가 심장을 훔쳐 달아날 때 테피티는 정말 마우이를 막을 수 없었을까? 테피티의 큰 그림이었을까? 결국 다시 돌아올 마우이를 믿었을까? 마우이의 성장을 위해 그냥 눈 감은 걸까? 여러 질문이 갑자기 떠오른다. <모아나>에는 나오지 않는 테피티의 마음에 대해.


나는 나를 정확하게 알고 있나? 알아가는 중이지만 여전히 모르는 구석이 많다. 어떤 상황을 만나고 나서야 '나에게 이런 면이?' 라며 놀란다. 살아온 시간만큼만 나를 안다. 나를 나답게 하는 본질, 혹은 '테피티의 심장'은 하나가 아닌 것 같다. 본질이 변하지 않지만 형태와 방식은 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으므로. 그 모든 것이 하나의 본질일 수도 있지 않을까? 


예전에는 딱 떨어지고 명확한 것을 선호했다.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지 않으면 틀렸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이 질문에 답하려고 생각을 모으는 중에 문득 떠오른다. 파워포인트로 강의안을 만들때 마음에 드는 이미지에서 색을 따오려고 스포이드를 갖다 대면 내가 생각했던 그 색이 아니다. 내 눈에 보인 매력적인 색은 스포이드로 찍은 점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색을 가진 점들이 모여 그렇게 보인 것뿐이다. 눈으로 보이는 색도 구분 짓지 못하고 섞여서 하나의 이미지가 되는데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 숨 한 번 들이쉬고 내쉬는 찰나에도 '오 만' 가지 생각과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구분하고 선을 그을 수 있을까. 


결국 본질이란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행동의 경향성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윤지원'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긍정, 끈기, 예리, 책, 영화, 여유, 진정성이다. 방금 남편에게 '윤지원은 이렇지'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해달라고 했다. '도전정신과 탐구심이 있다' '깊게 파고든다' '호와 불호가 명확하다' '자신의 장단점을 잘 안다' '맺고 끊는 게 확실하다' '경청을 잘한다' '긍정적이다' '말을 예쁘게 한다'라고 했다. 들으며 '그렇지.'와 '그런가?'가 오간다. 아마 나를 아는 다른 누군가에게 물으면 조금 다른 말을 들려줄 것이다. 빛이 비칠 때 시간에 따라 각도에 따라 다른 색으로 보이는 것처럼 우리는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테카와 테피티는 하나다. 우리 마음에 선과 악이 동시에 있는 것처럼. 그리고 때로는 선과 악이 섞인 비율에 따라 다른 마음의 문양이 되는 것처럼. 선과 악 사이 매우 많은 사정이 있을 것이다. 구분 짓고 선을 긋는 것이 분명 필요한 순간이 있겠으나 그러기 전에 충분히 알 필요가 있다. 전후 사정과 맥락에 대해. 우리 자신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누구는 자신의 긍정적인 면을 확대 해석하고 누구는 부정적인 면을 확대 해석한다. 같은 것을 서로 다른 관점으로 보고 다르게 말하기도 한다. 나는 나를 제대로 보고 있는지 '제대로'는 무엇인지 나의 경향성은 무엇에 기반하고 있는지 조금 더 생각해봐야겠다. 그리고 우리가 '본다'는 것을 얼마만큼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우리가 '심장'인 줄 알고 있던 것이 사실은 '신장'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덧, 아래는 작년(2020년 8월)에 같은 질문에 답했던 내용이다.

이 질문에 답을 하려면 언제 나답지 않은 지 생각해 봐야 할 듯하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너답지 않게 왜 그래?”의 대답으로 클리셰처럼 나오는 대사는 “나다운 게 뭔데?”이다. 이 대사를 들을 때마다 불편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니 타인이 나를 고정하는 것 같기 때문이더라. 타인의 눈에 좋은 의미의 ‘답다’도 있지만 결국은 나를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을 때 “너 답지 않게 왜 그래?”였다. 모아나에서 테피티는 생명을 머금고 생기를 세상에 흘려보내는 생명의 여신이다. 본질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이다. 사실 나의 본질은 나를 지으신, 이 세상에 보내신 이가 가장 잘 아실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려면 소명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는 말과 같다. ‘이게 없으면 윤지원이 아니지.’라고 나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것.... 나에게 있어서 테피티의 심장을 이루는 요소는 아마도 크리스천으로서의 존재감이 가장 크겠다. 그리고 나의 성장을 통해 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 선한 의도, 사랑, 양심. 때때로 심장을 잃을 때가 있지만, 어쩌면 심장을 스스로 떼어서 안 보이는 곳에 숨겨 둘 때도 있지만, 그래서 나의 그림자들로 어두움에 휩싸일 때가 있지만, 이제 나는 내 심장이 제 기능을 하는지 아닌지를 알아차릴 수 있다. 




<하루 10분, 영화에서 건져 올린 질문으로 글쓰기>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하루 10분, 질문을 보고 떠오른 생각을 인스타그램에 매일 정리합니다. 그 글들을 씨앗 삼아 브런치에서 하나씩 심어 보기로 했습니다. 나도 몰랐던 나를 알게 되는 과정이 되리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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