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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수야 Oct 24. 2020

나의 세계

할머니도 소녀였던 시절이 있었겠지#12

할머니, 지금 나의 세계에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가득 차 있어요.


같이 수다를 떨며 카페를 가며 이곳저곳 함께 놀러 다니는 친구들

서로 땀 흘리며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직원들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상상만 해도 가슴 뛰는 크로아티아의 따뜻한 햇살

내가 읽어주기만을 기다리며 책장에서 엷게 먼지가 쌓인 소설책


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많은 것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빼곡하게 차는 게 느껴져요.


너무도 크게 자리 잡은 것들과

아득히 작게 자리 잡은 것들 사이에서

어릴 적 나의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게만 느껴졌던

할머니의 품은 점점 희미해져 간다는 걸 어쩌면 할머니도 느끼고계겠죠?


나는 알아요.

할머니가 요즘 참 외로워한다는 걸


그래서 이모와 통화를 하며 눈물을 보이는 게 잦아지고

내가 집 밖을 나설 때면 언제 들어오는지 물어본다는 걸.


우리가 집에서 밥을 먹을 때는 반찬이 조금이라도 부실하게 느껴질 때면

언니와 내가 잠에서 깨기 전 밖에 나가 국거리를 사러 가시면서도

집에 아무도 없으면 물에 밥 말아 드시며 대충 배만 채우신다는 것도요.


티브이를 보다가 너무도 예쁜 풍경이 나오면

할머니는 가족을 떠올리지만

저는 저 혼자 훌훌 떠나는 상상을 하고는 해요.


나의 세계에 다른 것들이 너무도 가득 차 있어서

이제는 너무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할머니의 존재가 희미해질 때면

할머니의 세계는 우리로 가득 차 있어서

다른 것들이 들어올 틈이 없다는 것이 마음이 아려온다는 걸 한 번도 말한 적은 없어요.


할머니의 희생이 당연하게끔 만들어 버린 것이

그리고 그것을 어쩔 때는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제가


할머니의 세계를 갉아먹고 자라온 애벌레같이 느껴져 입안 가득 역함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럴 때면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며 할머니에게 뭐 드시고 싶은 게 없냐며 묻는 것이

그것조차 나 스스로를 위해서라는 걸, 차마 이야기할 수는 없어요.


할머니

나의 세계는 이렇게 이기적이고 저를 위한 것들로만 가득 차 있어요.


이런  세계를 차마 보여드릴 수가 없어요.

할머니는 분명 이런 저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집에서 밥 먹을 때가 거의 없는 저에게 뭐라도 먹고 다니라며

투박하게 깎아놓은 사과 하나를 건네실 테니까요.


이제 와서 할머니의 세계에 우리만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답답해하며 다른 것들로 채우려는 것이

오히려 할머니를 공허하게 만드는 것임을 이제는 알아요.


그러니 나의 세계에서 할머니를 좀 더 자주 생각할게요

그렇게 오래도록 저의 세계에 할머니가 소중하게 자리할 수 있도록

더 많이 함께 시간을 보내요.


이것이 못난 손녀가 할머니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어서 참 죄송해요.

이걸 차마 말하지 못해 이렇게 검은 글자로 적어내리는 무뚝뚝한 손녀여서 참 죄송해요.


항상 할머니가 먼저 물어보았지만 이제는 제가 먼저 여쭤볼게요.

식사는 하셨냐고,

아프신 곳은 없냐고,

날이 따뜻해지면 함께 제주도로 여행 가자고 말이에요.


따듯한 햇살을 받으며 넓은 유채꽃밭에서 환하게 웃는 할머니의 미소는 참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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