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도 소녀였던 시절이 있었겠지#11
"그럼 반대로 할머니랑 살아서 나쁜 점은 없어?"
흠.. 나쁜 점?
글쎄.. 굳이 이야기해 보자면
엄마가 두 분인 것 같은 느낌?
우리 할머니가 워낙 걱정이 많으셔서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오거나 외박하려고 하면
엄마보다 더 역정을 내시면서 뭐라고 하시니
고등학교 때 내 별명이 '9시 땡! 신데렐라'면 말 다했지
그리고 집에 항상 할머니가 계셔서
내가 혼자 있고 싶을 때에도 혼자 있을 수가 없다는 거?
지금은 내 방이 따로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긴 하지만
내가 워낙 혼자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하다 보니
독립하고 싶은 마음이 커.
저번에 한번 살짝 이야기해 봤을 때 할머니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이 흉흉한 세상에 너 혼자 어떻게 나가 사냐면서 소리치시긴 했지만..
나 조차도 할머니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사랑한다는 걸 아니깐
뭔가 그런 거 있잖아..
그 사랑이 너무 과해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
할머니에게는 내가 아직도 고사리 손으로 할머니를 꼭 붙들며 유치원 가기 싫다고
울어대던 유치원생 같이 느껴지는 것 같아.
아! 그리고 길 가다가 다른 어르신분들이 추운 날씨에 나물을 파시면서 하나만 사달라고 하면
우리 할머니 생각이 나서 지나치지 못하는 점?
저번에는 나도 돈이 없는데 어떤 할머니께서
찬바람에 꽁꽁 얼어버린 시금치 한 단만 사달라는 거를 지나치지 못해서 곤란한 적도 있었지!
결국 그 날 점심은 굶고 저녁에 구멍 난 비닐봉지에 먹지도 못하는 시금치를 가득 담아 집에 가져갔지 뭐야.
내가 살아온 시간 곳곳에 할머니가 존재하지 않은 적이 거의 없어서
할머니가 없는 나의 시간들을 상상해 보면 벌써부터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어.
워낙 눈물이 없어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하는데
할머니의 관해서는 조금만 건드려도 입구가 열린 물풍선 마냥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게 참 신기해.
앞으로 내가 살아갈 시간들과 할머니의 시간이 같지 않다는 걸 느낄 때면
나에게 친구이고, 엄마이고, 아빠였던 할머니의 존재의 부재가 너무도 클 거란 걸 알아서
차라리 처음부터 부재했다면 아프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슬픔의 시한부 선고를 받아놓은 것처럼 너무 두렵고 무서워.
그래서 그냥 이런 감정들이 언젠가는 나를 휩쓸 것 같아서
그게.. 참 나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