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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제이 Oct 10. 2024

목적지가 선택되었습니다(3)

#3. 가로등 불빛을 받으려면 밤이 되어야 한다.

출처 핀터레스트

드르릉 탁, 삑, 툭툭툭      


가로등이 드문드문 비추는 밤길을 걸으며 퇴근하던 어느 늦은 밤, 꺼진 시동 소리에 이어진 저의 발소리를 들으니 나도 모르게 갑자기 차가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서늘한 기분이 가끔 찾아오곤 했지만, 그날처럼 또 다른 무엇인가가 흘러넘치는 기분은 태어나 처음이었습니다. 이날은 학원의 위치를 옮기며 세운 경영 목표를 드디어 돌파한 날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저와 함께 차에서 내린 허무한 감정이 몰려왔습니다.


저는 지난 7년 동안 쉼 없이 실패해 왔습니다. 그 실패들을 밟아 일어서 성공으로 이루기 위해 얼마나 악착같이 버텼는지요. 좋은 결과를 맛보기 위해 꿈에서도 수업하고, 학부모님들을 만났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 과정을 힘들었다고만 여기진 않습니다. 그때는 매일 저녁 다이어리에 목표를 적어 놓고, 하나씩 정복하는 기분으로 게임 하듯 즐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목표를 달성한 그날, 뜨거운 기쁨의 눈물이 아닌 차갑고 쓸쓸하기만 한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 당혹스러운 감정에 놀라, 다시 차에 올라 좌석을 뒤로 눕혀 눈물을 숨겼습니다. 그저 주체할 수 없이 흘러넘치는 이 감정의 이름은 무엇이라 해야 할지 짙은 밤하늘을 보며 쓴웃음 짓게 되는 그런 밤이었습니다.

    

2016년. 이사로 인한 3년여의 경력 단절 후 공부방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점에 결혼 생활이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결혼 후 생활비 부분의 어려움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고, 그 문제로 남편과는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결국 경제적 독립이 필요했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좋아했기에 고민 없이 공부방을 열 수 있었습니다. 내 아이들을 돌보며 경제적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은, 제게 있어 가장 큰 장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사일과 육아와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일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들었습니다.      


잠깐 결혼 이야기를 해볼까합니다. 남편이 ‘좋은 사람’인 것과 ‘좋은 남편’인 것은 다른 얘기임을 결혼 직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앞으로의 이야기에서 조금씩 덜어내 보여드릴게요. 그가 (다른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인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결혼 14년을 돌아보면 결혼 후 10년간 남편은 나에게 좋은 남편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교육관이나 경제관 등의 여러 가지 가치관이 너무나 달랐기에 지금까지도 삐걱대곤 하지요.


누군가 그랬지요. 결혼은 어느 한쪽이 확실하게 져 줘야 평화가 유지된다고. 지나고 보니 그 말이 참 와닿습니다. 신혼 4~5년은 다툼없이 잘 사는 것처럼 보였지요. 저는 불만을 참으며 쌓아만 뒀지, 해소할 곳이 없었습니다. 남편 이직 때문에 일 년에 한 번씩 지역을 바꿔가며 이사를 하니 친구를 사귈 시간도 없었던 이유가 가장 컸던 것 같습니다.아이러니하게도 어쩌면 그때가 우리 결혼 생활 중 –겉으로 보이는 면에서- 행복한 듯 보이던 때였습니다. 가끔, 주변 엄마들을 만나 남편 이야기가 나오는 날이면 최대한 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해버렸지요. 명확하게 제가 의도한것이었습니다. 남편 불평으로 시작되어 시댁 이야기로 마무리 되는 그 자리에서 저의 불평불만이 터져버리면 폭포수처럼 쏟아질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제가 싫었습니다. 일 년에 몇 번, 친정에 가는 날 엄마에게 하소연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아시죠? 친정에 조차 다 하지 못하는 그런게 있는 거. 그렇게 말도 하지 못했던 동안 제 속은 얼마나 타들어 갔는지요.


여러 화약이 섞인 듯 저는 결국 폭발했습니다. 이혼을 결심하고 집을 나가던 날이었습니다. 남편의 물리적인 힘에 제지당하고 시어머니께 처음으로 너무 힘들다는 말을 꺼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니가 참아라, 그 정도면 그래도 다행 아니냐, 애 엄마가 애들 두고 어디를 가느냐.”는 말 뿐이었습니다. 엉엉 울며 간 친정에서는 남자가 한 번 그럴 수 있지 않겠냐는 친정아버지의 말은 너무 싶게 저를 찔렀습니다. 그때 어쭙잖게 문제를 일으킨 남편보다 어른들이 던진 말에 더 깊은 상처를 받은 게 분명합니다. 지금도 그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고 작은 바람에도 쓰라립니다.


이후, 아이들이 보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해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다짐했습니다.

‘예전의 나로 돌아가자. 나를 돌보고, 아이들을 챙기며 살자’라고. 이기적으로 보이겠지만,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라고 믿었습니다. 나 스스로를 돌보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돌봐주지 않는다는 걸 언젠가부터 느끼고 있었으니까요.


결국,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핵심은 ‘경제적 독립’이었습니다. 그렇게 저에게 있어 경제적 독립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습니다. 남편, 그리고 가족 –친정과 시댁- 과의 관계도 문제 해결은 내 힘으로 해야만 하는 것이 분명했지요. 경제적 안정만이 이 모든 갈등 속에서 나를 보호해 줄 유일한 방패였던 셈입니다. 그렇게 저는 매일 밤 잠든 아이들의 손을 만지며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할 것을 결정하고 집중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과거의 실수와 실패로 빚어진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가기로 했습니다.


학원을 열고 나서도 매일이 고비였습니다. 학원을 열기 전 시도했던 카페는 인테리어 사기를 당하며 큰 빚을 지게 되고, 그 때문에 남편과의 갈등은 끊일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더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수업 준비, 홍보, 상담, 집안일까지 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찾아온 –그렇게도 간절히 원하던- 셋째를 두 번이나 떠나보내니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습니다. 그때가 제겐 가장 큰 슬럼프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슬럼프를 넘어서기 위해 쉬면서도 저는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깨달았지요. 내가 지금까지의 모든 걸 해냈다는 사실을. ‘내가 해내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다짐이 저를 다시 일어서게 했습니다. 이 다짐은 나를 가정의 무게와 경제적 도전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위치는 내가 만들고 말겠다는, 유치할지도 모르는 소신이 그 한마디에 담겨있음을 이제야 말해봅니다.


그 소신이 있었기에, 지금처럼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여러 가지 일들로 휘청거릴지언정 절대 꺾이지는 않았습니다. 그 마음이 너무 단단해서였을까요. 조금 부드러움이 필요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부드러움의 부재가 목표를 이루고나서도 그 허무한 감정의 소용돌이 안에서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생각이 들자, 다시 한번 제가 느낀 허무한 감정에 대해서 홀로 차 안에서 자문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이 감정 또한 사치가 아닐 지를요. 분명 실패라고 여겼던 지난 7년이라는 시간은 목표 달성이라는 달콤한 보상을 내려주었지요. 남들에게는 별것 아닐지도 모를 목표 달성이지만, 그 달콤함은 이 일을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 일을 하며 나는 얼마나 땀을 흘리고 눈물을 흘렸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상처받으며 나 자신이 얼마나 단단해졌는지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허무함! 아, 저는 이 또한, 저에게 신이 내려준 보상임을 알기에, 이 모두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나의 일’을 더욱 성숙하게 이끌어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가로등 밑에서 피어오른 허무한 감정을 감사하게 여기기로 정했으니, 이제는 가로등 불빛을 벗 삼아 기쁜 퇴근길을 “잘 살았어. 고생했어. 잘 견뎠어.”라는 칭찬으로 마무리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확실히 ‘누군가’로 성장했습니다.

성공이라는 말을 쓰기에는 아직 멀었지만요. 그러나 이제는 누군가 정해놓은 성공이라는 자리에 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두 아들이 태어날 때, 나 역시 ‘엄마’라는 이름으로 새로 태어나 자랐고, 성장했습니다. 동시에 나의 가치를 찾았습니다. 지금의 저는 그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기에 이제는 성공을 내 곁에만 두고 보기만 해도 행복합니다.     


저는 확실히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신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고난을 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피하고 싶은 고난이지만, 사실 신이 내린 고난을 무슨 수로 비껴갈 수 있을까요. 결국, 저는 피하지 않고 긴 고난의 시간을 버텼고, 이겨냈습니다. 그런 제가 앞으로 못할 것이 있을까요. 늘 그래왔듯이, 드문드문 보이는 가로등 아래에 도착할 때마다 다음 가로등을 향해 한 발 내딛는 용기, 그것 하나면 됩니다.     


이렇게 작은 성공을 맞이하며 ‘소중함의 가치’를 깨달은 그날부터 저는 도전할 수 있음에 감사한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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