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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는 우리의 변명을 덮어준다

나약한 날에도 괜찮을 수 있는 계절

by 그냥 하윤

“비 온다니까 그냥 다음에 보자.”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대개 “그래, 이해해” 라고 답한다. 신기한 일이다. 평소 같으면 미안해하고 또 미안해했을 텐데, 장마철의 약속 취소는 유독 죄책감이 덜하다. 마치 하늘이 내 편이 되어준 듯한 기분이랄까.


비는 훌륭한 공범자다.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될 속마음을 대신 말해주는 대변인 같은 존재.


장마는 어쩐지 나를 조금 더 이해받게 만드는 계절이다. 억지로 웃지 않아도 되고, 의욕 없는 모습을 감추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시간. 모든 것이 축축하게 늘어지는 이 계절에는, 사람도 덩달아 늘어져도 괜찮다는 무언의 허가증이 발급되는 것만 같다.


약속을 깨는 나, 게으른 나,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나에게 장마는 완벽한 ‘명분’을 만들어준다. “비도 오고 상태가 안 좋아서요.” 라는 말은 절대 변명이 아니다. 오히려 감정에 솔직한 사람처럼 보인다. 솔직함과 변명 사이의 경계가 이렇게 모호할 수도 있구나 싶다.


사람들은 날씨라는 절대적 조건 앞에서는 관대해진다. 개인의 의지나 성격 탓으로 돌릴 수 없는 외부 요인이니까. 햇살이 쨍쨍한 날 "오늘 좀 우울해서 못 가겠어" 라고 하면 어색하지만,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같은 말을 하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날씨가 감정의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셈이다.


우리는 때때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이유를 붙이고 싶어진다. 왜 이렇게 무기력한지, 왜 만나기가 싫은지, 왜 침대에서 나오기 싫은지. 내면의 흐릿한 날씨를 외부의 날씨로 번역하는 것이다. 그럴 때 장마는 아주 훌륭한 통역사가 되어준다.


실은, 비가 안 와도 가고 싶지 않았던 약속이 있다. 피곤한 얼굴로 억지 미소를 지어가며 참석해야 할 모임, 에너지를 쥐어짜내야 하는 대화들. 이런 순간에 마침 장마가 와주면, 내 솔직한 마음에 공식 타이틀이 붙는다.


"장마 때문이야."


슬퍼할 특별한 이유는 없는데도 꾹꾹 눌러놓은 감정들도 마찬가지다. 어쩐지 서글픈 기분, 뭔가 허전한 마음, 이유 없이 코끝이 시큰한 순간들. 평소라면 “별일 아닌데 왜 이러지?” 하고 자책했을 텐데, 장마철에는 다르다.


"날씨 때문에 기분이 그렇지 뭐."


그냥 쉬고 싶었던 날들도 있다. 특별히 아픈 건 아니지만 침대와 하나가 되고 싶은 날, 아무도 만나지 않고 혼자 있고 싶은 날. 이런 욕망은 평소에는 이기적으로 여겨지기 쉽다. 하지만 비가 오면 다르다. 날씨가 내 게으름을 정당화해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기후 탓'은 사람들을 더 쉽게 설득시킨다. 왜냐하면 다들 안다. 장마철에는 원래 뭔가 다 귀찮고 흐릿해진다는 걸.


마치 세상 전체가 슬로우 모션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모든 것의 속도가 늦춰져도 괜찮다는 암묵적 합의가 존재한다.


인생은 원래 맑은 날만 있을 수 없다. 억지로 해가 떠야 할 이유도 없다. 가끔은 구름이 끼고, 비가 내리고, 모든 것이 잠시 멈춰도 된다. 그런 시간이 있어야 다시 일어설 힘도 생긴다. 장마는 휴식에 대한 사회적 승인서 같은 것이다.


장마는 모든 것을 멈추게 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이해받게도 해준다. 빗소리는 침묵을 어색하지 않게 만들어주고, 흐린 하늘은 무표정해도 되는 허락을 준다.


그리고 해가 나면, "그땐 좀 그랬지" 하고 웃을 수 있다. 젖은 옷을 말리고, 습한 공기를 환기시키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장마 때문에 미뤘던 일들을 하나씩 처리하기 시작한다. 그때의 나약함이나 게으름을 특별히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그저 계절의 일부였으니까.


그래서 우리에게는 가끔 그런 장마가 필요하다. 완벽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억지로 활기차지 않아도 되는 계절, 잠시 멈춰도 되는 ‘날씨 탓’의 시간. 그건 비겁함이 아니라, 숨 쉴 틈이다.


비는 내리고, 우리는 잠시 멈추고, 세상은 그것을 이해해준다. 이보다 조용하고 완벽한 핑계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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