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이기에 가능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것.
등원차량을 기다리던 중, 6살 된 작은 아이가 나를 꼭 안으며 뽀뽀를 해주고 간다. 지극히 보통의 평범한 순간이 다르게 다가왔다. 우는 아이를 안아서 연신 괜찮다며 달래 준 후 아이가 보인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속상한 감정을 뒤로한 채 자신을 달래준 엄마에게 마치 고맙다며 뽀뽀를 해주고 등원하는 아이의 뒷모습에 마음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조건 없이 사랑을 주어야 하는데 받고만 있구나.'
우울증이라는 핑계로 아이들에게 엄마로서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했다. 엄마가 아무리 화를 내도 아이들은 끊임없이 애정을 표현했고 다가왔다. 어떤 날엔 아이들을 모두 재우고 난 후 조용한 시간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루종일 한 말이라고는 "저리 가, 엄마 좀 내버려 둬, 저기 가서 놀아." 이 세 가지밖에 없구나.' 그래도 다음 날이 되면 마치 전 날의 기억은 모두 사라진 듯 아이들은 또다시 나에게 다가왔다. 사랑 가득한 표정을 하고서. 매일 그렇게 죄책감의 늪에 빠져 악순환되었다. 그래서 오늘이 더더욱 특별했다. 아이들이 나에게 쏟고 있는 이유 없는 사랑이 드디어 눈에 띄기 시작했다는 거니까. 내가 변했다는 뜻이니까.
어느 날 하루는 맛없는 식단을 먹는 중이었다. 엄마를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큰 아이가 말한다. "엄마. 다이어트 안 해도 돼. 그러니까 그런 거 말고 맛있는 거 먹어."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엄마 다이어트 한 게 더 좋지 않아? 이뻐지는 게 좋다 하지 않았어?" 큰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옆에 있던 작은 아이가 한마디 한다. "응!! 엄마 납작해져야 해. 그러니까 먹지 마." 그래. 참으로 반대의 성향이구나 우리 아이들.
최근에 읽었던 책들 중 '다정한 관찰자'에 대한 에세이가 있었다. 그 책을 완독 한 후 내 마음엔 한 문장이 남았다. 바로 다정한 관찰자는 부모가 아니라 아이들 일 수도 있다는 것. 글을 통해 마음속 돌덩이들이 하나둘씩 비워져 가는 과정에 읽은 책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책을 읽고서 나는 우리 아이들이 그동안 나를 얼마나 열심히 관찰해 왔는지를 잘 알 수 있었다. 동시에 마음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기다란 소파에 내가 앉으면 아이들은 마치 1인용 소파인 듯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앉는다. 나는 말한다. "옆으로 좀 가서 앉아. 이렇게 넓은데 왜 자꾸 달라붙어?" 정말 매일같이 후회하는 순간이자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에서 가장 용기를 필요로 하는 말이다. 아이들은 그저 엄마가 너무 좋아서 옆에 있고 싶은데 그 마음을 나는 모른 채 외면해 왔다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이러한 조건 없는 사랑을 듬뿍 받을 수나 있었을까? 반대로 나에게 기회가 주어진 들 이유불문 내 모든 감정에 사랑만을 듬뿍 담아낼 수 있었을까?
아이들은 솔직한 존재이다. 그들의 순수하고 투명한 감정에 더 이상의 상처는 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아무리 엄마일지라도 내가 받는 사랑에 감사함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그 감사함이 부디 사랑으로 전달될 수 있기를, 그래서 나 또한 아이들에게 배운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