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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ngry Traveller Aug 23. 2017

할리우드 영화를 틀어주는 터키의 후미진 찻집에서

터키 할아버지들의 소굴

터키 제3의 도시라는 이즈미르의, 싸구려 호텔들이 즐비해 있는 어느 바자르 골목에서 할아버지들이 모여 있는 찻집을 지나치게 되었다. 왠지 웅성웅성 시끄러운 그곳의 분위기에 끌려서 나도 들어가 차를 한잔 시켰는데 그곳에는 나만 빼고 다들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셨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찻집의 구석에서 체스를 두시거나 터키 식 게임을 즐기시는 할아버지들만 빼고는

 모두 시선을 위쪽에 두고 계시는데. 대체 이 후미진 카페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할리우드 영화를 틀어주는 후미진 찻집

사실 처음에는 그저 터키의 고전 영화 정도를 틀어주나 보다 했다. 어? 그런데 저 여자 배우는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사실 가끔 텔레비전에서 터키 영화를 보아도 저것이 과연 할리우드 영화인가 터키 영화인가 한참을 보아야만 구별할 수가 있다. 터키도 외국 영화에 터키어 더빙을 하기 때문이고 터키인들은 서양 사람들과 많이 닮은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여배우는 정말 낯이 익다…

갑자기 들려오는 할아버지들의 웃음소리. 그 영화는 ‘스케리 무비 4’였다..


터키 차 한잔과 영화에 빠져들다


터키어로 더빙을 하고 있었지만 너무나 쉬운 그 영화의 줄거리를 나도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여러 영화들을 패러디했기 때문에 더 쉬웠는지도 모르겠다.

터키의 오렌지 차인 오랄렛

터키의 오렌지 차인 오랄렛이 곧 나왔고 나도 터키 할아버지들과 함께 그 영화에 빠져 들었다. 영화를 보고 있다가 너무 웃긴 장면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어 버렸다. 그러면 터키의 할아버지들은 더 좋아라 하시며 웃어 대셨다. 옆에 앉으신 할아버지는 혹시 담배냄새가 날까 봐 담배꽁치로 쌓여있던 재떨이를 비워주시기도 했고 입을 헤 벌리고 영화를 보고 있던 나에게 다가오신 베레모를 멋지게 쓰신 할아버지는 내 손에 박하 맛 사탕 한 움큼을 얹어 주시고 가셨다.

그 박하 맛 사탕 2-3개를 한꺼번에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면서 나머지 사탕들은 휴지에 싸서 가방 안에 넣어 두었다. 이번에는 다른 할아버지가 오시더니 내 손에 들고 계시던 이슬람교의 묵주같이 생긴 것을 들려주시는 게 아닌가? 난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영화가 끝나는 내내 그 염주를 손에 들고 염주 알을 돌리고 또 돌렸다. 그분도 내가 결코 무슬림이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아셨겠지만, 그저 여행 잘하라는 염원이 담겨 있구나 했다.

고된 하루의 끝자락에서 즐기는 차 한잔


찻집 풍경... 이것저것 잡다한 일상이 오가는 곳


그렇게 다 같이 찻잔을 손을 쥐고서 영화에 한참 빠져 있을 때, 누군가가 들어와서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터키 말이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할아버지들의 구두 쪽으로 손가락을 가리키는 걸 보니 아무래도 구두 닦는 아저씨인가 보다. 아저씨는 찻집을 한 바퀴 도시며 고래고래 소리를 치셨지만 아무도 그 아저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텔레비전의 그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샤워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장면은 전혀 야하지 않은, 그러니까 그 여배우가 샤워를 하고 있을 때 그 여자의 몸 뒤에서 파란 손이 나오는 그런 장면이었다. 이를테면 ‘너 파란 종이 줄까? 빨간 종이 줄까?’ 하는 우리나라 고전의 한 장면 같았다고나 할까? 그 구두닦이 아저씨 뒤를 이어서 들어온 빵장수 아저씨.

도넛 모양의 깨가 잔뜩 뿌려진 터키 빵을 파는 그 아저씨, 그래도 막판에 빵 2-3개는 성공적으로 파신 모양이었다. 그 빵은 터키의 홍차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깨 빵이었기 때문이다. 야채와 터키 치즈가 얇은 밀가루 빵에 말려 있는 터키식 샌드위치를 배달하는 아저씨를 보고 나도 하나 주문했다.

그 빵을 막 먹고 있는데 그 뒤를 이서 이번에는 겨울 점퍼를 파시는 할아버지의 등장!

뒤쪽 의자에 앉아계셨던 할아버지는 사시지도 않을 거면서 그 점퍼를 입어 보시고 그 점퍼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으시더니만, 예상대로 사지 않으셨다. 그래도 아무런 불평 없이 찻집을 나가시는 점퍼 파는 아저씨.  다시 영화를 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손톱깎이나 라이터를 파시는 아줌마가 들어오시기도 하고. 영화 상영에 방해꾼들이셨지만 그 모습들이 어찌나 신기하고 재미있던지. 별미 같았다고나 할까?

문 옆쪽에 영화가 상영되던, 말던 그 앞을 마구잡이로 가려대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아무도 그들에게 비키라는 말도 하지 않았고, 중간에 영화가 끊기거나 해도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는 모습들은 정말 대단해 보였다. 그 참을성에 말이다. 차를 나르시는 아저씨는 쟁반에 터키 식 홍차를 올려놓고서 찻집을 한 바퀴 돌면서 차를 권한다.

 그러면 차를 마시고 싶은 사람은 그 쟁반 위에서 홍차 잔을 하나 집어 들면 된다. 아저씨가 쟁반 위에 차를 올려놓고 찻집을 한 바퀴 도시면,

터키식 블랙커피

나도 모르게 차를 한 잔 더 마시게도 되고... 차를 마시다 질리면 다시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아저씨는 빈 찻잔들을 다시 그 쟁반에 수거해 가시고 다시 10분 즈음 지나면 홍차로 채워진 쟁반을 들고 찻집을 한 바퀴 도신다. 그러면 사람들은 “금방 마셨잖아요?” 하며 차 마시기를 거부하기도 하고. 어쨌든 차를 한 잔 하지 않으면 그 찻집의 영화 티켓도 잃고 마는 것이다.

그 10분 동안, 찻집은 분주하기만 하다. 그 10분 안에만 찻집을 들락날락거리는 사람들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옆에 앉아계신 할아버지가 나가시 길래 ‘아... 가시네?’ 했는데 5분 후에 다시 찻집으로 들어오셔서 차를 한잔 더 하시기도 하고... 뭐 그런 식이다. 그 분주한 가운데 찻집 주인아저씨는 가스불을 켜신다고 난리를 부리신다.

가스통이 옆에 있다는 것에 불안하기만 한데 이번에는 그 가스통과 연결된 전구에 종이 불을 대서 불을 켜시려고 하는데 그 불붙은 종이가 내 발 밑에 살짝 떨어지는 통에 나는 그만 너무 놀라버렸다. 그 작은 일상도 이 찻집에서는 하나의 화젯거리가 된다. 모두들 그 가스불이 켜지나 안 켜지나 지켜보는 가운데 영화는 계속 진행되고...

찻집 구석에 쌓여있던 물 담배 기구들.

“요즈음은 너도나도 담배만 피워 대서 물 담배를 하려고 들지 않지. 한번 해 볼 테야? 4리라거든.(우리 돈으로 2100원 정도)”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가운데 나 혼자 물 담배를 물고 있을 상상을 해보니 왠지 망설여지기만 했다.

 “내일 해볼게요.”

내일이라는 말은 얼마나 완벽하고 편한 말인가? 내일이라는 말이 없었다면 어떻게 곤란한 상황들을 해쳐나갈 수 있었을까? 우리에게는 늘 ‘내일’이라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잡념에 빠져 있을 때 영화는 어느새 끝이 나고 말았다.


과거에 앉아 있는 기분

다음날 다시 그 찻집에 들러보니 이번에는 아놀드 슈와츠 제네거의 오랜 영화인 ‘토털 리콜’을 하고 있었다. 내가 차를 나르는 아저씨를 불러서

“저 영화는 너무 오래되었어요. 봐요. 영화를 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잖아요?”

나는 최신 영화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까 전에 이 찻집을 지나가면서 보니까 슈퍼맨을 하고 있던데... 웬 토털 리콜? 그 영화는 인도 텔레비전에서만 5번도 넘게 본 영화란 말이지. 사실 터키 아저씨 한분이 토털 리콜을 아주 재미나게 보시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분은 이곳에 살고 계시니 언제든 다시 토털 리콜을 보실 수 있겠지 하면서 나는 그만 이기적아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알겠어. 2분만 기다리면 다른 영화를 틀어 줄게.”

와! 성공했다. 싸구려 차 한 잔(200원)에 최신 영화를 볼 수 있다니 얼마나 좋단 말인가?

삼성 디브이디를 쓰는구나 하면서 차를 한 잔 더 시키고 여유로움에 빠져 있는데 아저씨가 바꿔 틀어준 영화는 내가 인도에서만 너무 질리도록 보았던 스파이더맨 1이었던 것이다... 역시 이기적인 사람에게 돌아오는 것이란 없지... 다시 바꿔달라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아서 그래도 그럭저럭 즐겁게 영화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찻집은 암흑에 빠져 버리고! 터키에도 정전이 있단 말인가! 할아버지들의 한 숨소리와 야유 소리가 들려오고 어차피 전기가 들어와도 스파이더맨을 틀어줄 것이 뻔해서 나는 그 암흑 속을 빠져나와 호텔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일 다시 무슨 영화를 틀어주나 가봐야지... 이즈메르의 그 바자르 거리에서 4일을 지내면서 나는 하루에 3-4번씩 그 찻집을 들락거렸고, 만약 그 찻집을 지나는 길이면 무슨 영화를 틀어주는지 늘 기웃기웃거렸다.

나 같은 단골손님들의 얼굴도 익혀서 만약 찻집에서 우연히라도(사실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그곳에 출근이라도 하는 듯했기에) 만나게 되면 눈인사를 주고받았고 이제는 영화가 잘 보이는 전용좌석까지 얻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그 찻집 안으로 들어서면 할아버지들이 나의 전용석이 된 그 자리를 비켜주시곤 하게 되었다. 가끔 작은 다툼이 일어나기도 했던 그 찻집... 그러면 모든 찻집의 할아버지들이 나서서 작은 싸움을 말리기도 했던 그곳. 그저 일상이 흘러가는 것만 같았던 그 찻집. 정이 듬뿍 들어있었던 우리의 어린시절의 일상을 떠올리게 해주는 한 장면 같은 곳이라고 할까.

옛날이 그리운 사람들에 적절한 찻집...

오늘도 터키의 할아버지들이 모두 모여 TV 쪽으로 시선을 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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