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를 달리고 있었다. 언덕을 넘으면 파인애플 밭이 양 옆으로 펼쳐지는 드넓은 평원이었다. 더운 날이었지만 에어컨 대신 창문을 모두 열고 하와이의 바람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랜덤으로 재생되는 플레이리스트에서크라잉넛의 '좋지 아니한가'가 울려 퍼졌다.
신나게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서서히 눈물이 차올랐다. 그 길을 달리는 내내 펑펑 울면서 운전했던 기억이 난다.
항암치료 종료 후 친구가 있는 하와이로여행을 계획했다. '탁솔'이라는 약을 4번 맞는 치료였는데 짧은 기간 강렬하고 혹독하게 고생을 했다. 약을 맞고 나면 온몸이 흠씬 두드려 맞은 듯이 아팠다. 눈동자를 굴리면 눈알이, 혀를 움직이면 혓바닥이 아팠다. 전신이 퉁퉁 부어 내가 나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몸이 변해버렸고, 빡빡 깎은 머리에서는 계속 수포가 잡히고 고름이 터졌다. 몸을 추슬러 하와이로 놀러 갈 생각에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었다.
비행기 표를 사고 어디 가서 무엇을 먹을지 계획을 짜며 행복했던 것도 잠시. 반대편 가슴에서 또 무언가가 만져졌다. 여행을 떠나기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부랴부랴 병원에 연락해 조직검사를 넣고 비행기에 올랐다.
진짜 암이라는 녀석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왜 다들 '암'을 무서운 병이라고 하는지 호되게 알아가는 중이었다.
공항에 마중 나온 친구 얼굴을 보았을 때, '내색하지 말자'고 수백 번 되뇌었던 다짐들은 날아가고 왈칵 눈물이 터졌다. 놀란 친구는 나를 하와이에서 제일 좋은 레스토랑으로 데려갔고 오랜 시간 묵묵히 내 이야기를 다 들어주었다.
그날은 혼자 하와이 북쪽 끝 '노스 쇼어'로 향하던 중이었다.
달콤한 휴가가 끝나고 한국에 돌아가면 조직검사 결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여행 중에도 계속 마음 한쪽이 무거웠었다.
'최대한 잊고 즐겨보자!'
하며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집에 갈 시간이 다가올수록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 치료가 끝난 지 3개월도 안 됐는데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복잡한 생각들이 하와이의 아름다운 자연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나마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슬픈 마음이 조금이나마 희석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러던 중에 그 노래를 들었다.
"나무가 사라져 간 산 길. 주인 없는 바다.
그래도 좋지 아니한가. 내 마음대로 되는 세상.
밤이 오면 싸워왔던 기억. 일기 쓸만한 노트와 연필이 생기지 않았나. 내 마음대로 그린 세상.
우린 노래해 더 나아질 거야. 우린 추억해. 부질없이 지나날들 바보같이 지난날들.
그래도 우린 좋지 아니한가. 바람에 흐를 세월 속에 우리 같이 있지 않나.
이렇게 우린 웃기지 않는가. 울고 있었다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세상에 우린 태어났으니까."
울고만 있었다면 만날 수 없는 세상에 나는 태어났으니까. 일기 쓸 수 있는 노트와 연필도 있고, 바람에 흐를 세월 속에 같이 있을 사람도 있고.
내 상황은 너무 힘들고 슬픈데, 그래도 또 이만하면 괜찮은 건가 싶었다.
무엇보다 살고 싶었다. 깨끗하게 완치가 되는 것은 너무 욕심인 것 같아서, 그게 그렇게 어렵다면 지금처럼 유지만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현실은 너무 슬픈데 이 풍경과 이 노래와 이 바람. 지금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더 오래 살고 싶은 욕심과 삶에 대한 의지가 용솟음치는 순간이었다.
하와이에 있는 9일 동안 스카이다이빙, 절벽 다이빙, 스노클링, ATV, 빅아일랜드 화산섬 투어 등 내가 좋아하는 다양한 체험들을 즐겼다. 친구와 함께 바다거북이를 보았고 마지막 날 밤에는 아무도 없는 시크릿 비치에서 스키니 디핑(알몸 수영)도 해보았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고 그래서 더 짜릿했다.
그리고 귀국하기 전 가장 하와이스러운 엽서를 한 장 사서집으로 편지를 보냈다.
'이나야,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면 어떤 일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는지 몰라. 아마 무섭고 힘든 일일 수도 있어. 어떤 결과를 받게 되든 씩씩하고 용감하게 잘 헤쳐나갈 거라 믿는다.'
여기는 분명 천국인데 머지않아 초조한 마음으로 떨고 있을 나에게 작은 손길이라도 건네고 싶었다.
수 없이 떠난 여행이었지만 그때 그 하와이 여행은 내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고, 벅찬 위로의 시간이었다.
기억을 더 되돌려 보면 첫 항암치료가 끝나고 외출했을 때 느꼈던 감정도 비슷했다.
당시에는 치료 중 면역력이 극도로 떨어지기 때문에 외출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친구들을 만나는 일도 모두 집에서만 가능했고, 어쩌다 외출할 일이 있을 때에는 마스크로 무장을 한 뒤 대중교통이 아닌 자차를 이용했다. 컨디션이 괜찮은 날에 동네 한 바퀴를 도는 게 그나마 활동의 전부였다. 6개월이 넘는 치료가 끝나고 모자를 쓸 수 있을 만큼 머리가 자라고 나서야 마음 편히 밖을 나갈 수 있었다.
집 근처 평생학습관에서 하는 수업을 듣기 위해 치료 후 처음으로 버스를 타던 날이 지금도 생생하다. 손잡이를 잡고 서 있다가 얼마 후 자리에 앉았고, 다음 정거장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조금 열린 버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무척이나 상쾌하게 느껴졌다. 창 밖에 보이는 풍경들도 모두 그대로였다. 늘 다니던 길이었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더 반가웠다. 버스를 타고 외출을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정류장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누가 밝게 인사를 하며 손에 전단지를 쥐어주었다. 얼떨결에 받아 든 종이에는 한 종교 단체의 광고와 함께 기도문이 실려있었다.
"큰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주십사고 기도했더니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습니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는데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어 기도했는데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습니다
삶을 누릴 수 있게 모든 걸 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주셨습니다
구한 것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내 소원은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르지 못하는 삶이었지만
내 맘속에 진작 표현하지 못하는 기도는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는데,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습니다.'라는 구절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항암치료가 끝나고 고대하던 첫 외출은 당시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손에 쥐어진 기도문이라니. 하늘에 있는 누군가가 나에게 전하는 말 같았다.
그 이후 '내가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이 뭘까?'에 대해서 많은고민을 했다. 명확한 답은 구하지 못했지만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살아가는 동안 아프고 힘든 사람들,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특히 나의 글로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용기를 줄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
돌아보면 나의 청춘은 좌절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견딜 수 없이 힘든 순간에는
'왜 죽지도 않고 계속 아프기만 하지?'
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누구보다 간절하게 살고 싶었지만 이런 바람과는 달리 반복된 시련에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라는 무서운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쓰러지면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정진해도 어김없이 꺾여버리는 상황에 무력해졌고, 우울은 나를 저 밑바닥까지 끌어내렸다.
'어차피 이번 생은 망했으니 다음 세상에서 잘해봐야지.'
싶었지만 그래도 삶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 지독하게 불행했을 때에도 희미하게 내려오는 한 가닥 빛을 붙들고 삶의 의지를 다졌고의욕을 되찾았다.
가장 힘들 때 떠난 여행에서 만난 아름다운 하와이의 자연이, 우리 존재 파이팅을 외치는 어느 락밴드의 노래가, 우연처럼 내 손에 쥐어진 그 옛날 성인의 기도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