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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Feb 22. 2023

아버지의 비닐우산

비껴갈 수 없는 세월 

'후두득'

빗소리에 잠이 깼다.

창문을 열어보니 제법 굵은 빗줄기가 내린다. 아버지를 모시고 정기검진을 예약한 날이라 슬그머니 걱정이 앞섰다. 요즘 들어 통증을 호소하시는 아버지와 병원을 가는 횟수가 부쩍 잦다. 나란히 걸을 때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아버지를 마주하고는 깜짝 놀란다. 구부정한 등과 휘청거리는 걸음걸이. 불안해 보일 때는 간간이 부축도 해드려야 한다. 어쩌면 휠체어에 의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는 세월을 붙잡고만 싶다.





밖으로 나와 우산을 펼쳐 들었다. 아련한 기억 속에 저만치 사춘기 소녀가 서 있다. 그날 아침, 소녀는 학교도 못 가고 발만 동동 굴렀다. 쓸 만한 우산은 동생들이 재빠르게 들고 이미 학교로 내뺀 뒤였다. 말짱한 체크무늬 우산과 고장 난 비닐우산 두 개만 마루에 덩그러니 쓰러져 내 눈치만 살폈다. 말짱한 것을 집어 들자니 아버지가 걸리고, 비닐우산을 쓰자니 창피했다. 얄미운 동생들을 생각하며 한참을 망설인 끝에 내 손은 말짱한 우산 쪽으로 가고 말았다. 살 하나가 빠진 비닐우산은 보나 마나 아버지 차지였다.


뒤에서 묵묵히 웃고 있던 비닐우산이 어느새 체크무늬 우산 곁으로 바짝 따라왔다. 비닐우산을 쓴 아버지의 옆구리에는 낡은 도시락 가방이 볼썽사납게 매달려 있었다. 골목을 벗어나는 시간은 왜 그리도 길던지 숨이 막힐 정도였다. 간신히 큰길로 빠져나왔지만 심장은 쿵더쿵 방아를 찧고,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다. 아버지의 초라함을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소녀는 정류장을 몇 걸음 앞두고 발길을 뚝 멈추었다. 그리고는 비닐우산 쪽으로 손을 쭉 뻗었다.


“아버지, 저랑 우산 바꾸세요.”

“아니다, 나는 괜찮다.”


우산을 뺏으려는 소녀와 절대로 뺏기지 않으려는 아버지가 옥신각신했다.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길 한복판에서 진풍경이 연출됐다. 다시 한번 아버지의 우산을 잽싸게 움켜쥐려는 순간, 소녀는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을 보고 말았다. 비닐우산을 든 손에 힘을 잔뜩 주시던 바람에 옆구리에 붙어 간신히 버티고 있던 도시락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진 게 아닌가. 흥건하게 고여 있던 빗물이 ‘털썩’하고 비명을 질렀다. 내 마음도 덩달아 '털썩'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가방을 집어 올리느라 구부러진 아버지 등줄기 위로 쏟아지던 빗줄기를 잊을 수가 없다. 굵은 빗줄기는 야단치듯 소녀의 가슴을 세차게 때렸다. 가방에 묻은 흙탕물을 황급히 털어내고는 다시 옆구리에 낀 채 성큼성큼 걸어가시던 아버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씩씩했던 아버지.


비바람은 왜 그리도 세차게 몰아치는가. 아버지의 커다란 몸을 가리기에 비닐우산은 너무나 빈약했다. 가뜩이나 살 하나가 빠져 휙 날려갈 듯 위태로워 보였건만. 아버지는 버스 꽁무니에 매달려서도 당당하게 손을 흔들며 소녀의 등굣길을 재촉했다. 소녀의 머리 위로 투두둑 떨어지는 빗줄기를 막아 주던 커다란 우산은 바로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어려운 농가의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서울에서 대학을 마쳤다. 학사 출신자가 귀하던 때라 출셋길을 달릴 수도 있었지만 사람의 앞길에는 운이라는 그림자도 따르는가 보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품으로 회사를 퇴직한 날부터 시련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한 사업을 동업자의 배신으로 접고, 영세 수공업에도 손을 대보았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그 후로도 몇 번의 사업을 시작했지만 꽃도 펴보지 못하고 문을 닫아야 하는 현실에 부닥쳤다.

   

살림만 하던 어머니는 매일 눈물바람으로 여기저기에 아버지의 취직을 부탁했다. 연약했던 어머니는 다섯 남매를 먹이고 입히느라 팔을 걷고 부치고 억척스러운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성실함을 눈여겨본 어떤 기업가로부터 출근 제의가 들어온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버지는 퇴직할 때까지 한눈팔지 않고 한 우물만 파셨다. 그것은 오로지 가족을 위한 헌신이었기에 가능했다.

 

어머니가 딸 넷을 내리 낳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괜찮다’는 말로 다독였다.

올망졸망 커가는 자식들한테도 큰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다가올 세상에는 여자도 어엿한 직업이 있어야 한다며 앞길을 열어주려고 애썼다. 어려운 형편에도 우리가 끝까지 학교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아버지의 남다른 교육열 덕분이다. 아버지의 비닐우산과 도시락 가방이 없었던들 지금의 우리가 어디 을까.

 



친정에 도착하니 아버지는 외출 준비를 마치고 나를 기다리셨다.  젊은 아버지는 어디 가고 고목처럼 등이 휜 늙은 아버지만 서 있었는가. 사춘기 소녀의 가슴을 펑펑 울리던 비닐우산과 도시락 가방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 누군들 세월을 비껴갈 수 있으랴. 엊그제 맞춘 보청기를 끼워드리며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온갖 풍랑이 일 때마다 온몸으로 물살 가르며 가족을 지켜냈던 분. 거센 비바람 앞에서도 꿋꿋하게 견뎌낼 수 있도록 커다란 우산이 되어주신 아버지다. 


이제는 내가 아버지의 남은 생애에 든든한 우산이 되고자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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