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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여인 Apr 01. 2023

봄, 소생하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요양재활병원이냐, 집이냐

  만물이 일어나는 봄이다. 남해에는 벌써 꽃축제가 한창이다. 내가 사는 주변도 한바탕 꽃축제에 동참하기 위해 숨죽여 준비 중이다. 여봐란듯이 ‘팡’하고 불꽃을 터뜨릴 날만 기다리는 꽃망울들. 가지마다 송송 맺힌 꽃망울을 보며 나도 한 가닥 희망을 가져본다.


아버지가 S종합병원에서 N재활병원으로 옮겨간지도 벌써 한 달째다. 종합병원에 입원한 지 5개월이 되던 날, 퇴원 요청을 받고 가족들은 며칠간 고심했다. 집으로 모실까, 의사의 권고대로 재활병원으로 모실까? 고민 끝에 일단 병원에 모시기로 결정을 내렸다. 재활치료를 중단하면 그 효과가 반감되니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말도 있고, 기관지 삽관을 하신 라 집으로 가면 위험다는 말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아버지는 새로이 바뀐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하셨다.

  

일주일에 한 번만 면회가 허락되는데 오늘로써 네 번째이다. 동행자는 역시 엄마다. ‘얼마나 많이 좋아지셨을까’하는 기대를 안고 안내받은 5층으로 올라갔다. 물론, 면회에 앞서 신속항원검사에서 음성 확인을 받아야만 한다. 코로나가 완전히 사라져 코를 후벼 파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할 텐데. 횟수가 잦다 보니 멀쩡한 코가 아픔을 호소하니 엄마 코도 걱정이 된다.

  

푸른색 보호가운과 비닐장갑을 착용한 후에 엘리베이터를 다. 감색 가운을 입은 중국 동포 간병사들이 서로 말을 주고받는다. 이 중에 혹시 우리 아버지를 간병하는 분도 계실까 해서 최대한 공손하고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5층 508호실은 격리병실이다. 입원한 지 며칠뒤, 세균에 감염되었다며 일반병실에서 쫓겨오신 곳이다. 그동안 항생제를 너무 많이 투여해서 장내 유익균까지 다 죽어버린 탓에 염에 취약하다고 한다. 보건소에 신고해야 하는 균으로써 일주일마다 한 번씩 ‘음성’이라는 결과 세 번 나와야 다시 일반실로 갈 수 있다. 그렇다면 병 주고 약 주는 게 아닌, 약 주고 병주는 셈이 됐다. 간호사가 설명하는 세균 감염 경로가  의심스럽기는 다. 혹시 환자 다섯을 돌보느라 일손이 바쁜 간병사의 게으름이나 부주의에 의한 건 아닐까.

  

깔끔하게 정돈된 병실에 햇살이 마구 쏟아져 들어 조금은 안심되었다. 창가 쪽으로 길게 놓인 침상에 여자 환자가 세 분, 벽 쪽으로는 남자 환자가 머리를 맞댔다. 아버지는 안쪽 침상에서 눈을 뜨고 누워계셨다. 역시 깔끔한 외모와 초롱초롱한 눈빛은 초점이 없는 다른 환자와는 비교불가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아버지의 얼굴을 따갑게 비추었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커튼 가림막으로 빛을 차단한 곳에서 넉 달이나 있던 아버지한테 얼마나 절실 햇살인가.

   

들뜬 목소리로 아버지를 부르는 엄마가 벌써부터 울먹다. 내 눈에 딱 거슬린 것은 콧줄이었다. 일주일 전과 콧줄 위치가 달라져 있다. 분명히 오른 콧구멍에 끼워졌었는데 왼쪽으로 바뀐 게 이상했다. 콧줄이 빠졌었다는 건데 간병사는 말을 안 해준다. 콧줄이 떼어지지 않도록 테이프로 단단히 고정해야 하는데 언제라도 쑥 빠져나올 것처럼 엉성다. 이 상태로 놔둔다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조마조마하다. 콧줄 꿰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지 옆에서 지켜봤기에 자꾸만 거슬리는 걸 어쩌랴.


S병원에서는 콧줄이 빠질 때마다 인턴이 와서 콧줄을 넣었다. 목구멍에서 위장까지 쭈욱 내려가야 하는데 가다가 목구멍에서 걸리기 일쑤라 한 번에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진땀을 빼던 인턴이 포기했다가 나중에 다시 와서 시도한 적도 있다. 아버지한테는 고통이요, 꿸 때마다 병원비 정산서에 십만 원 정도가 얹어지는 건 감수해야 한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안정감 있던 아버지가 심리적으로 약간 불안해 보였다. 손에는 검은 벙어리장갑까지 끼워졌고, 발목은 줄로 묶여 있으니 당연한 변화다. 무슨 죄가 있다고, 죄수도 아닌 환자의 손과 발을 꽁꽁 묶어놨을까. 노인이 움직이면 얼마나 움직인다고. 더군다나 환자가 힘을 쓰면 얼마나 쓴다고 이리도 매정하게 묶어놨는지 야속했다.

  

목이  엄마는 이내 눈물바람으로 아버지 몸 구석구석을 만지고 살다. 간병사 말을 들어보니 어젯밤 주무시다가 목구멍에 붙은 목관을 잡아 뜯었다고 한다. 아마 무의식 중에 벌어진 일 같다.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라 병원에서는 당연히 재발을 막고자 조치를 취했겠지. 그 과정에서 간병사나 간호사한테 얼마나 많은 잔소리를 들었을지 작이 간다. 아버지는 밤사이 일어났던 일을 기억 못 하신다고 한다.  한자 또박또박 읽는 총기 여전한데 아버지한테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아버지는 환자복을 걷어올려 팔뚝을 가리키며 입으로 계속 뭐라 하셨다. 도저히 알아차릴 수가 없어 휴대용 칠판을 드렸다. 글자조차 완전하지 않아 쓰는 과정을 잘 지켜봐야 했다.


나 많이 말랐어
집에 데려가 주어
지금이라도


아무리 노력해도 근육은 빠져 말라가니 이제 다 포기하고 ‘집으로 가고 싶다’는 표현인가 보다. 많이 힘들지만 죽을힘을 다 해 여기까지 잘 참아오셨는데. 아버지 입에서 나온 숱한  말들이 뚫린 목구멍 사이로 바람처럼 새나갔다. 입 모양만 가지고는 소통이 불가능했기에 또 칠판에 쓰도록 해드렸다.


여기 누가 데려왔어
나 좀 가자
나하고 같이 가자


생각해 보면 기가 막힌 노릇이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있나, 집이 있어도 갈 수가 있나. 서럽고 원통한 마음만 한가득 안고 계실 버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환자 기록지를 받아 든 원장은 16가지의 병을 달고 온 힘든 환자라고 아버지를 지칭했다. 아버지는 척수염 수술 후 재활이라는 명목으로 이곳에 오셨다. 걷느냐, 마느냐는 오로지 아버지의 의지에 달렸다고 주지 시켰다. ‘걸으면 집으로 가실 수 있어요’라는 말 아흔 아버지한테 무 큰 부담을 안겨드렸다. 수술을 무사히 끝내고 흡인성폐렴에 코로나까지  견뎌내는 동안 아버지 몸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버다. 나약한 노인에 불과한 아버지한테 '의지'운운한다는 것은 자식의 욕심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굳세게 노력하면 걸을 수 있다는 말, 그것은 젊은이들한테나 해당되는 게 아닐까.

  

수개월 간 병원생활을 하면서 짜증 한번 안 내신 분은 세상천지에 우리 아버지밖에 없을 거다. 온순하면서도 능동적인 자세로 현실에 대처해 오셨다. 오죽하면 병원 내에서 ‘미소 천사 할아버지'라는 별명까지 붙여 주었을까. 면회를 갈 적마다 간간이  수 있었던 미소가 어느 순간 눈물로 바뀌버렸다. 마음속에 소용돌이가 치고 있는 게 확실하다. 아버지 눈에 그렁그렁 고인 눈물이 이내 눈꼬리를 따라 주르륵 흘내렸다. 자주 눈을 감는다는 것은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는다는 의미다. 어젯밤 나도 잠이 안 와서 캄캄한 허공을 응시한 채 멍하니 누워있는데 눈물이 났다. 면회를 앞두고 기대 반. 두려움 반 마음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검은 장막 저편에서 아버지가 나를 부르며 손짓하는 듯했다.

  

‘집을 떠나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면서 알지 못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곳. 서로 얘기도 못 나누며 눈만 꿈벅꿈벅하는 사람들이 누워있는 곳. 그 낯선 공간에 꼼짝없이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얼마나 두렵고 쓸쓸할까.’

  

의사 말에 따르느라 아버지를 집에도 못 들르게 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집을 가까이 두고도 병원으 가신 게 불쌍해서 내 눈에서도 눈물이 고인다. 나는 아버지께 위안의 말씀을 드렸다.


   집으로 당장 모실게요.
   그동안 운동 열심히 하고 계시면
   집으로 가실 수 있어요


되지도 않는 말을 주섬주섬 늘어놓는 게 죄송해서 아버지의 눈을 외면했다.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던 눈빛을 접고 이내 애기처럼 천진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다시금 희망을 품어보는 모습이었다.

  

혼자 힘으로 화장실 출입만 할 수 있게 만들어 달라는 바람으로 보내드린 이곳 요양병원. 걷기는커녕 말하지도 먹지도 못하는 우리 아버지를 어떻게 해야 할까. 간절하게 집으로 오고 싶어 하는 아버지를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한번 가족들의 중지를 모아야 할 중요한 시점이다.

  

한편으로 나는 의사를 원망하기도 한다. 어쩌면 ‘물에 빠진 사람 구해냈더니 내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냐는 욕을 먹겠지만 어쩔 수 없다. 목을 뚫어 숨통을 트이게 하는 의술이 있었다면 원래 상태로 되돌릴 수 있는 의술도 뒤따라야 하지 않나. 지금 생각해 보니 S병원에서 퇴원하라고 했을 때, 내가 한 말은 정말 순진했었다.

  

  “뚫어놓은 목을 막아주어야 퇴원을 하지요.”


숨을 쉬게 해 주었다는 걸로 소명을 다 했다고 할 수 있는가.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있어야지 진정한 삶이지, 숨만 쉬면 되느냐는 말이다. 철없는 어리광에 불과할 테지만 억울한 심정을 어디든 호소하며 생떼를 부리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엄마는 아버지가 배가 고파서 힘이 없는 게 아니냐며 코로 들어가는 영양죽 양을 늘려달라고 애원한다.


“이 양반이 원래 밥양이 컸어요.”


치료에 관해 아무 권한도 없는 간병사를 붙잡고 소용도 없는 하소연해 봤자 구슬프기만 다.

   

이불을 들춰 아버지 다리 상태를 점검했다. 예상대로 기저귀만  알몸이었다. 일의 효율성을 높이고, 오물 처리할 시간을 줄이기 위해 바지는 너무 거추장스러운 복장이다. 나도 간병 노릇을 해봤으니 십분 이해할 수 있지만 너무 처참하다.


기저귀 아래로 뻗은 두 다리는 지난주와 거의 차이가 없다. 근육이 다 빠져 나무도막처럼 뻣뻣한 다리에 언제쯤 근육이 붙을까. 몸을 가눌 수 있을 만큼만 붙어 주어도 한이 없겠다. 엄마는 지금 당장 근육을 붙여보겠다는 신념을 가진 것처럼 자꾸만 다리를 주물렀다.

   

원칙적으로 면회 시간은 단 10분이지만 거의 한 시간 이상 편의를 봐주었다. 남편 손을 잡고 흐느끼며 구구절절 슬픔을 토해내는 백발여인을 이내 쫓아낼 수 없었나 보다. 칠판에  글자를 해석하고 대답해 드리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다음 주 면회 올 때까지 ‘운동 열심히 하시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는 처지가 딱했다. ‘마음 단단히 먹고 시키는 대로 잘하고 계시라.’는 엄마의 말을 끝으로 병실을 나왔다.  우리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실까? 우리가 떠난 뒤 어떻게 하고 계실까? 만사 귀찮다는 듯 눈을 감은 아버지 눈꼬리로 흐르던 눈물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신발 가져왔나?

  

지난주 면회 때, 신발 가져오라고 쓰셨는데 그걸 다 기억하고 계셨다. 신발을 신고 마음대로 걸어 병실을 나오고 싶은 거다. 신발을 신고 하루빨리 집으로 오고 싶은 거다. 그런 분을 언제까지 낯설고 우울한 곳에 계시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병실을 나오면서 간호사와 나눈 이야기가 아직도 귓전에 뱅뱅 돈다.


"환자분이 외로움을 타시는 것 같아요. 우리들이 지나가면 옆에 있어달라고 해요. 운동도 열심히 하시니까 걸어 나가실 수 있겠어요"


아, 외로움이었구나.

의료진이 한 말, 나갈 수 있어요,를  다시 한번 믿어보고 싶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다. 저 꽃망울처럼 봄축제에 참여하려고 숨죽여 준비 중은 아닐. 여봐란듯이 ‘쓱’하고 일어나 기지개를 켤 날 기다리는 움츠림은 아닐까. 저 대지의 봄기운을 받아 우리 아버지 몸도 활짝 피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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