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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사람 Feb 11. 2023

평범한 마농바게트 하나

구토의 시작

9월 3일 금요일 

 밤 사이 비가 그치고 하늘이 갰다. 날이 밝아 환해진 귤 밭 가운데 있는 농막은 휴식하며 건강을 회복하기에 완벽해 보였다. 농막은 복층으로 층고가 높은 단독 주택 모양이었다. 농번기가 아니더라도 가족들과 주말에 들러 쉬다 갈 생각으로 넓게 공간을 만든 곳이라 했다. 현관 입구를 들어와 오른편으로 두 칸의 작은 방이 있었고, 왼편으로 넓은 거실을 건너면 큰 방이 하나 더 있었다. 거실 한쪽 벽면을 따라 올라가는 계단으로 이어진 복층에는 귤 밭 방향을 바라보는 작은 책상이 놓여 있었다. 책상 옆 낮은 책장에는 집주인의 취향을 짐작할 수 있기 충분할 만큼의 오랜 책들이 꽂혀있었다. 내게도 큰 창 너머 좋은 경치가 보이는, 나만의 서재가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양이 목적이었던 만큼, 엄마와 나는 관광지가 아닌 농막 주위를 먼저 돌아보기로 했다. 농막에서 멀지 않은 곳에 주로 작은 배들이 오가는 위미항이 있었다. 소항구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여러 식당부터 초등학교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읍내라고 불리기에 충분해 보였다. 관광객들도 꽤 찾아오는 동네인지 '한 달 살이 가능'이라는 푯말도 곳곳에 보였다. 가장 마음 가는 곳은 버스 정류장 건너편에 위치한 독립서점이었는데, 작은 책방 안은 아기자기했다. 제주 지역을 테마로 한 독립 출판물에서부터, 책방 주인이 직접 큐레이팅한 책과 엽서나 스티커 따위의 귀여운 문구류도 함께 판매하고 있었다. 평소 서울에서도 작은 책방을 찾아 종종 구경하러 다녔는데, 독립 책방을 운영하며 먹고사는 일이 경제적으로 충분할지 항상 걱정했었다. 언젠가 직장인의 굴레를 벗고 좋아하는 공간을 운영하며 살고 싶으면서도, 먹고살 걱정이 내게 더 큰 두려움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손님이 얼마나 올 지 모르는 섬 마을에서, 서점을 예쁘게 가꾸어 가는 일을 기꺼이 결심한 책방지기의 마음이 새삼 존경스러웠다.


 위미항 오른편으로 바닷가를 끼고 걷다 보니 '서연의 집'이라는 카페가 나왔다. 영화 '건축학 개론' 촬영에 사용한 건물을 카페로 개조해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조용히 숙소 주위를 산책하겠다는 사람들 앞에 뜻밖에 핫플이라니. 영화를 웬만큼 좋아해서는 찾아오지 않을 공간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많은 관광객으로 붐비고 있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없던 호기심도 생기기 마련이다. 아무리 어지러워도 인기 있는 공간을 무심코 지나칠 수는 없었다. 비틀거리는 걸음 탓에 엄마 팔을 붙잡고 다녀야 했음에도, 카페 2층까지 올라가 영화에 나왔던 제주 바다의 풍경을 두 눈에 담았다. 농막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마농바게트를 사 먹었다. 마농은 마늘의 제주 방언이라고 하니, 그냥 평범한 마늘바게트를 하나 사 먹은 셈이다. 하지만 평범해 보이는 일이 평범하지 않은 사건의 출발이 되기도 한다.


 빵을 급하게 먹은 탓인지 속이 울렁이고 더 심하게 어지러웠다. 엄마는 소화가 안되고, 대사 순환이 잘 안 되면 어지러울 수 있다고 했다. 평소에 자주 체하고, 저혈압 증세도 있는 엄마는 이런 종류의 어지럼증을 잘 안다고 했다.


 "아마도 니도 모르는 사이에 소화력이 떨어졌는갑다. 그래서 요새 계속 어지러울 수도 있다. 차라리 이번에 체하는 바람에 원인을 알았네. 제주에서 푹 쉬면 잘 회복해서 올라가면 금방 낫겠다 야."

 "어지럽다고 가만히 있지 말고 일어나서, 까치발을 들었다가 내렸다가 하면서 뒤꿈치를 땅에 '콩콩' 해봐라. 이거 100번 하면 막혀 있던 게 다 소화된다. 팔도 양 옆으로 펴서 동그랗게 '휙휙' 돌려봐라. 이렇게 하면 몸에 열도 나고 순환도 잘되더라고."

 "아! 엄마가 아로마 오일을 챙겨 왔는데 이게 또 천연 치료제거든. 병원 약보다 부작용도 없고, 엄마가 직접 효과를 체험했다 아이가. 팔다리랑 명치 밑에도 발라서 좀 문질러 줄게. 몸에 막혔던 순환이 뚫리면 금방 낫는다."


 엄마는 당신이 해보았던, 그리고 실제로 효과도 있던, 운동이라든지 민간요법들을 내게 시도했다. 몸을 열심히 움직이고 아로마 오일을 몸에 문지르다 보면 내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막혀 있던 혈이 뚫리며 무공이 높아지는 어느 무협지의 주인공처럼. 현실은 조금 달랐다. 몸속에 잠자던 것들이 깨어나서 온몸을 휘젓는 것 같더니, 온 내장을 휘저은 것들이 모두 입을 통해 밖으로 튀어나왔다. 먹은 것을 모두 올리다 보니, 더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워서 다시 토하기를 반복했다.  


 "그래 그래 잘했다. 오히려 다 토해내면 속이 편해진다. 아이고 우리 아들 고생하네. 내일은 영 괜찮을 거다."


 나는 토하느라, 엄마는 토하는 아들을 챙기느라 밤새 잠들지 못했다.

 아들이 토하다 지쳐서 겨우 잠이 들었을 때도, 엄마는 그런 아들 걱정에 여전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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