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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사람 Feb 12. 2023

홍진에 묻힌...

세상멀미에 침놓기

9월 5일 일요일

 하루종일 자면서 하루를 통째로 숙소에서 쉬었더니 컨디션이 조금 회복된 것 같았다. 속이 조금 편해지자 바깥바람을 쐬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마침 엄마도 산굼부리에 가고 싶다고 했다. 아직 산굼부리에 억새가 하얗게 넘실거리기에는 이른 시기였다. 엄마는 하얗게 흐드러진 억새보다 피기 전에 푸른 억새가 더 아름다운 거 아냐며, 지금은 관광객도 없어서 오히려 가장 좋은 시기라 했다. 바깥은 가을장마 탓인지 다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록 하얀 억새가 파도치는 계절이어도 오늘 같은 날에는 관광객이 아무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엄마를 따라나섰다. 산굼부리까지는 농막에서 버스로 1시간 가까이 걸렸다. 자주 다니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에, 정류장에서 산굼부리 입구까지 걷는 시간까지 더하면 편도로만 2시간에 걸친 여정이었다. 어지러움 탓에 차를 빌려 다닐 수도 없었지만 버스를 타고 천천히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산굼부리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덧 안개처럼 옅어진 비 만이 오름에 가득 차 있었다. 덕분에 우리 모자는 고요한 자연 속을 천천히 돌아볼 수 있었다. 물에 젖어 더 짙어진 푸른 억새밭을 구경하면서, 온갖 잡음으로 가득 차 있던 일상의 소음이 조금씩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너무 많은 소리가 내 속에 가득 찼던 것은 아니었을까. 마음의 소리보다 크게 들리는 바깥의 목소리들이 나를 정신없이 어지럽게 만드는 것일지도 몰랐다. 휴가동안 제주의 자연을 마음에 많이 담아가자는 생각을 하자, 산책로 위를 기어가는 달팽이 한 마리도 눈에 보였다. 집을 등에 인 달팽이는 위풍당당하기보단 처연한 속도로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집이 회오리 모양인 것을 미루어, 집이 있는 달팽이나 집이 없는 나나 어지러이 살아가는 것은 마찬가지일 지도 몰랐다.


 돌이켜보면 산굼부리만큼이나 그전에 갔던 식당이 인상 깊다. 산굼부리 아래, 정류장 맞은편에 있는 '각지불'이라는 오래된 식당이었다. 방문했을 때가 늦은 점심시간이었음에도 사람들 몇몇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제주 현지인들 뿐 아니라 관광객들도 제법 찾는 곳인 것 같았다. 손님들은 주로 빨갛게 양념한 아귀탕이나 아귀찜을 먹고 있었는데, 보는 것만으로 입맛이 돌아올 만큼 맛있어 보였다. 내 속탈 때문에 우리는 매운 양념 없이 말갛게 끓인 아귀탕을 시켜 먹었다. 맑은 아귀탕을 충분히 맛있게 먹으면서도 옆 테이블에서 먹고 있는 얼큰한 아귀탕을 자꾸 흘깃거렸다.


 "이제 다 나았는갑다.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엄마는 가장 원초적인 욕구가 올라오는 건 그만큼 다시 건강해지고 있다는 신호라고 했다. 평소에 먹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속상한 일이었다. 건강할수록 무언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말은 반대로, 아플수록 가장 기본적인 욕구조차 포기해야 한다는 말일 수 있었다.

 사람다운 일상을 보내기 힘들어지는 시간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9월 6일 월요일

 농막을 숙소로 빌려준 엄마 지인은 내가 몸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귀포시에 있는 한의원을 소개해줬다. 양의원에서 잘 고치지 못하는 병을 한의원에서 금방 고치는 경우가 있는데, 특히 어지럼증이나 체증 같은 증상은 한방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했다. 엄마 역시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어지럼증이나 급체를 치료한 경험이 있다 했다. 제주에서 정해진 일정이라는 것 자체가 없어서, 어디 구경을 가더라도 한의원을 들렀다가 가기로 했다.


 한의원은 서귀포 시청 근처에 있었다. 오래된 건물 2층에 있었는데 1층에서부터 한약 냄새가 은은하게 났다. 의원 안에는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았다. 오전에 방문했음에도 점심시간 이후에 진료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어르신들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바로 한의원으로 침을 맞으러 온다고 했다. 어르신들이 이만큼이나 줄을 서서 진료를 볼 정도라면 정말 실력 있는 선생님이라고, 엄마는 말했다. 의원 앞 전신 거울에는 '경희대학교 동문회 증정'이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제주도가 선생님의 고향일까.' '서울에서 학업을 끝내고 고향 섬마을의 환자들을 살피려 돌아오셨을까.' '아니면 서울에서 개원하기가 녹록지 않았을까.' 이어지는 생각은, '나도 팍팍한 서울살이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지내는 건 어떨까.'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순서가 되어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한의사는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침놓기 편하도록 헐렁하게 입은 연회색 면바지와 면가운이 마치 위아래로 맞춰 입은 개량한복처럼 보였다. 그리 크지 않은 키와 호리호리한 몸매에 온화한 말투까지 더해지니, 흡사 도를 깨우친 선인 같다 보였다. 한의사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가진 사람인 것 같았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나요?"

 "최근에 계속 어지럼증이 있었는데, 엊그제는 체해서 구토도 심하게 했어요. 속이 안 좋아서 어지러운 건지, 어지러워서 체한 지 모르겠어요."

 "어지러운 건 어떻게 어지러운가요? 움직일 때 빙글빙글 어지럽나요?"

 "계속 어질어질한 느낌이 있고요. 귀에 물 들어간 거처럼 멍한 것 같기도 하고요..."

 "혹시 병원에서 사진 같은 것도 찍어봤을까요? 다른 문제는 없다고 합디까?"

 "사진을 찍어보진 않았고요. 대학병원 신경외과 진료를 받았었는데, 전정신경염이라고 하더라고요. 쉬면 자연스레 괜찮아지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음... 그래요..."


 한의사는 진맥을 하고, 등에 부항을 하나 놓아 나쁜 피를 뽑아내고, 손가락과 발가락 그리고 다리에 침을 놨다. 체한 탓에 속탈이 난 것은 그에 맞게 조치하고 어지럼증을 가라앉힐 수 있게 치료한다고 했다. 제주에 있는 동안에라도 침을 맞으러 오라고 했다. 한의사는 병원에서 조직적인 문제가 없다고 했다면, '세상멀미'라 진단할 수 있겠다고 덧붙였다.


 "옛날에 책에 보면, 풍진이니 홍진이니 세상살이에 병이 들었다는 이야기들이 있잖아요? 세상살이에서 얻은 멀미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진맥을 짚어도 특별히 나쁘진 않거든요. 그런데도 울렁거리고 어지러우니까, 마음을 편하게 먹고 기력을 회복하는 쪽으로 치료를 해봅시다. 너무 어지럽다고 걱정하지 말고 이 상태에 적응하다 보면 자연스레 괜찮아질 겁니다. "


 침을 맞고 숙소로 돌아오자 잠이 쏟아졌다. 안 맞던 침을 맞으면 몸살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세상몸살인지 침몸살인지 남은 하루를 전부 잠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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