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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민상 Jul 07. 2024

로마, 집으로 가는 길

야간열차를 처음 타본 초췌한 얼굴도 비현실적인 도시 경관에 생기가 돌았다. 걸으면 유적지요 박물관이었다. 이천 년 전 지어진 건축물을 도심 속 빌딩처럼 무덤덤하게 지나가는 로마시민들이 신기하게 보였다. 로마는 내 얕은 지식으로 담아두기엔 방대한 유적과 역사를 지녔다. 그래서 첫날은 천천히 거닐며 예습하듯 콜로세움과 포로로마노를 구경했고, 둘째 날은 바티칸 투어, 셋째 날은 밤 10시에 끝나는 워킹 투어를 신청했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본 거리를 걸었다. 더운 날씨에 한입 베어 문 젤라토가 녹아내려 떨어져도 깔깔거리며 웃었다. 처음 본 게 맞나 싶은 익숙한 풍경들은 마치 유명 연예인이 거리 곳곳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눈으로 담을 수밖에 없는 바티칸 속 작품 아래에선 느리게 시간을 보냈다. 언젠가 다시 온다면, 제대로 된 로마 책 한 권을 들고 천천히 몸으로 읽고 싶은 곳이다. 투어에 참여한 시간은 더욱 빠르게 흘러갔다. 마지막 날, 야간 워킹 투어까지 알차게 마치고 호텔이 있는 테르미니(Termini) 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눈이 시리게 푸르렀던 저녁 하늘이 사진으로 어떻게 담겼을지 기대하며, 버스 안에서도 설렘을 즐겼다. 그들이 타기 전까지는. 까만 피부에 하얀 눈동자. 그리스에서 느꼈던 불안감이 본능적으로 살아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편견이나 느낌이 아닌 사실이었다. 이탈리아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대화하는 그들은 버스로 올라오는 순간, 먹잇감을 찾는 하이에나처럼 매섭게 버스 안을 훑었다. 버스에 빈 좌석도 많았다. 그런데 그들은 뒤편에 몰려 앉은 우리 쪽으로 서로에게 눈짓을 보내며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오른쪽 창가 끝자리에 앉았고 내 앞으로 가족들이 있었다. 아이들은 털어봐야 사탕 정도 나온다는 걸 아는 걸까? 아니면 우두머리를 제압하면 나머지는 자연스레 따라온다 생각했던 걸까? 네 명 중 세 명이 나를 에워쌌다. 에워싼 밖의 사람들이 나를 볼 수 없을 정도로. 혼자라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게는 지켜야 하는 가족이 있었다. 그것도 세 명이나.

     

반사적으로 가방에 꽂혀 있던 삼각대를 꺼내 적당한 크기로 펼쳐 오른손에 쥐었다. 버스 바닥을 툭툭 치며 소리를 냈다. ‘내가 한국에서 좀 싸워 봤거든. 무기도 있어.’ 그러니 허튼 생각하지도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다리 떨림과 같은 박자로 삼각대는 떨리고 있었다. 삼각대를 들자 조금씩 안정되어 갔다. 대신 머리가 복잡해졌다. 주변 사람에 도움을 청하기엔 내가 당한 게 없었다. 설령 영어로 도움을 청한다 해도 사람들이 못 알아들을 수 있고, 그들 역시 들을 것이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든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침착하자. 침착.’  


일상적인 얘기를 하듯 가족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들을 의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의식되도록, 살짝 웃음을 띠면서. 아마 어이없고 황당해 나오는 웃음이었을 거다. 버스는 테르미니역이 종점이었다. 늦은 시간 역 주변은 그들이 없어도 충분히 긴장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버스 안 사람들은 하나둘 줄어만 갔다. 빠르게 판단하지 않으면 종점에서 하이에나와 먹잇감만 사이좋게 내릴 판이었다.

 

종점을 다섯 정거장 남겼을 때 가족에게 얘기했다. 버스에서 많은 사람이 내릴 때 같이 따라 내리는 것으로. 네 정거장 전. 한 명이 내렸다. 세 정거장 전.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두 정거장 전 다시 한 명이 내렸다. 그리고 종점을 한 정거장 남겨놨을 때 그들 무리를 뺀 대부분이 내리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지금 내리는 거야!” 다급하게 소리쳤다.

    

나는 아들의 손을 잡았고, 아내는 딸의 손을 잡았다. 닫히려는 문은 다시 열리며 우리가 버스에서 내리도록 길을 내줬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들도 당황했는지 두 명만 따라 내렸다. 멀어져 가는 우리를 보며 과장된 몸짓을 했다. 위협적으로. 방향 잃은 우리는 떨리는 마음이 진정되길 기다리며, 앞서 내린 사람들을 딱 붙어 따라갔다.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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