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그래픽과 배경음악, 환상적인 공간 디자인, 주인공 인물의 생김새도 떠오르는데 제목이 가물가물하지 뭐예요. 깜깜한 머릿속을 더듬더듬 움직여 영어 단어 두 개의 조합이라는 것, 네 글자 다음 두 글자가 온다는 것, 그리고 M 자가 들어가는 단어를 포함한다는 데까지는 도착을 했습니다. “잠깐만! 뭐더라…. 밀레니엄 파크?” 정답은 ‘모뉴먼트 밸리’였어요.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에서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아 답답했던 상황을 몇 가지 예로 든 에피소드의 일부다. 즐겨 읽는 김혼비 작가와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황선우 작가가 편지 형태로 주고받듯 써 내려간 에세이. 개인적인 일로 연재할 힘도, 틈도 없던 시간에 우연히 눈에 들어와 빵 터트렸던 글 속의 ‘모뉴먼트 밸리’와 ‘게임’이란 단어가 최선을 다하면 죽을 것 같은 나를 기어코 끌고 와 이번 에피소드를 쓰도록 책상 앞에 앉혔다.
이동-관광-휴식 그리고 또 이동, 이런 반복이 지속되던 여행의 끝자락은 게임 속에서 주어진 미션을 하나하나 해결하듯 건조하게 흘러갔다. 지금 내 상황처럼. 그래도 나만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기에 이런 푸념이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행여 같은 호흡으로 걷고 있는 식구가 비슷한 생각에 빠지지 않을까 싶어, 가슴을 억누른 머리는 활기찬 말투와 행동으로 ‘지금 우리는 정말 앞으로 해보기 힘든 여행을 하는 중인 거야. 이런 여행이 어떻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니’란 메시지를 전했다.
어떻게든 여행의 설렘을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에서도 느껴야 했다. 뭐, 그렇게 복잡하게 살지 않는 나는, 강렬하게 여행을 느끼기 위해서는 여행 깊숙이 들어가면 될 거라 느꼈고, 역시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 나는 깊숙이 들어간다는 건, 여행지 속 숙박시설로 들어가면 될 거라 생각했다. 단순 명료한 결정으로 다시 돌아올 설렘에 설레어하며 모뉴먼트 밸리 속 'The View 호텔'로 향했다.
비싸고 힘들게 예약한 곳에서 오래 머물고 싶었기에 서둘러 떠난 더 뷰 호텔로 가는 길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호텔까지 아직 멀었는데도 이미 여행지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 멀리까지 뻥 뚫린 사막에 사막보다 더 건조해 보이는 세이지 브러시만 가득한 땅에서, 난데없이 툭툭 튀어나오는 거대한 거인 같은 바위산들. 모뉴먼트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거인이 나타난 곳마다 못 본 척 스쳐가지 못했기에 모뉴먼트 밸리의 일몰을 결국 놓쳐버렸다. 똑딱이 카메라와 함께하며 이런 좋은 점이 있을 줄. 기대하던 풍경을 놓쳐도 크게 아쉽지 않았다. 어차피 똑딱이로 찍어서 대단한 작품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고, 분명 언젠가는 제대로 된 장비를 챙겨 들고 다시 올 거로 생각했다. 이미 사막의 맑은 공기를 가르고 있는 달빛만이 모뉴멘트 밸리를 비추고 있었다.
여행지 속 숙소의 장점은 졸릴 때까지 즐기다가 잠이 들면 되고, 눈을 뜬 시간과 상관없이 그저 문을 열고 나오면 짠하고 다시 여행지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일몰은 못 봤지만 일출은 보고 싶었다. 어슴푸레 밝은 기운에 밖으로 나왔을 때, 달 대신 태양이 계곡을 비추고 있었다. 그 에너지를 고스란히 받은 아이들은 놀이터인 양, 마냥 뛰놀기 시작했다. 태양 빛을 받은 세수도 안 한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황선우 작가의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아 답답하게 만든 모뉴먼트 밸리는 여행의 설렘이 느껴지지 않아 답답해하던 나에겐 정답처럼 나타났다. 한동안 이어가지 못해 미루던 이번 에피소드가 내게 정답을 알려주듯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단순하게 생각하라고, 문제를 피하지 말고 그 속으로 들어가라고 그리고 너무 최선을 다하지 말라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