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눈이 오네요
불규칙한 크기의 회색 눈덩어리가
대각선으로 소나기 오듯
세차게 떨어지네요
까마귀 제 갈길 찾아
깍 깍 거리며
진초록색 옥상으로 가고 있네요
하늘을 쳐다봅니다
눈이 내리면 하늘이 뚫려
아빠 모습이 행여나 보일까
고개를 치켜들어 하늘을 봅니다
하늘 구멍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 집이 꼭대기집이라
낮게 가라앉은 하늘에
아빠가 더 가까이 있게 느껴집니다
아빠가 저 하늘나라로 가신지
오래되었는데도
아빠가 가버리신 나이보다
제 나이가 더 먹었는데도
요즘 따라
아빠가 더 보고 싶네요
응애하고 태어났을 때부터
셋째 공주라고 참으로 많이 예뻐해 주셨어요
흑백사진 속의 저는
항상 아빠 품 속에 안겨 있네요
아빠가 저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
다시 느낍니다
호탕한 껄껄 웃음소리
온 가족 둘러앉은 밥상에서 하시던 말씀들
매년 산타처럼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시던 아빠
아빠는 우리 사형제에게
스케이트를 하나씩 다 사주시고는
겨울방학이 되면
매일 스케이트장에 다니라고 하셨지요
신나는 스케이트 타기는
그 시대 크게 누릴 수 있는 호사였어요
어느 겨울날 밤에는
넓은 우리 집 앞마당에
커다랗고 두꺼운 투명비닐을
넓디넓게 깔으시더니
기다란 고무호스를
수도꼭지에 끼워서
물을 그 비닐 위로 가득 채우셨어요
밤늦게까지 물을 받아두고는
모두 잠들었지요
딴딴한 얼음 스케이트장으로
변모되기를 두 손 모아 빌면서요
그러나 새벽에 나가보니
물은 얼음으로 제대로 바뀌지도 않았고
바뀐 부분도 울퉁불퉁하게 얼려져
스케이트를 탈 수가 없었지요
아빠의 작품은 실패로 돌아갔지요
그걸 만든 아빠도
기다리던 우리도
크게 실망은 했지만
그래도 너무나 낭만적인 아빠의 모습은
잊을 수가 없네요
얼음 스케이트 마당 만들기는 실패했고
균일하지 못한 얼음과 비닐과 고무호스를
치우느라 힘드셨겠지만
아빠가 만든 상상력은
참 기발하고 신기했어요
소년 아빠의 모습이
바로 제 앞에 있는 것 같아요
어느 해 크리스마스 며칠 전
크리스마스트리를
진짜 전나무로 만들어야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곤 늦은 밤에
남동생을 데리고 앞산에 가서
중간 크기의 소나무를 캐서 왔지요
전나무는 없었나 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상당히 불법적인 일인데요
어렸지만
어렴풋이나마
그건 옳지 못한 일을 하는 것 같아
내심 걱정이 되었어요
아빠와 남동생이 돌아와서 안심이 되었어요
아빠는 소나무를 어깨에 메고 오셨어요
빨갛게 상기된 볼을 하고 온
아빠의 얼굴이
생각납니다
커다란 화분에 소나무를 심은 후
거실 한쪽에 세워 놓으니
서양의 어느 따뜻한 분위기의 가정 같아 보였어요
마치 작은 아씨들 작품 속 한 장면처럼요
우리는 그동안 모아둔 크리스마스 장식품으로
소나무에 치장을 했지요
치렁치렁한 반짝이줄을 가장 많이 둘렀어요
초록색 빨간색의 반짝이줄로
소나무는 크리스마스트리로 변신했어요
쉴 새 없이 캐럴을 부르면서요
징글벨 징글벨 하면서요
제게 그런 반짝이는 시간을
선물해 준 아빠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그 트리에다가
저마다 카드를 써서 걸어두었죠
직접 도화지로 만든 카드 6장에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써서
소나무 잎사귀에 걸어 두었어요
아빠 엄마 큰언니 작은언니 남동생 그리고 산타클로스에게 썼어요
온 가족이 함께 꾸민 트리로
집 안이 환해졌어요
아랫목에 이불을 덮고 둘러앉아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인
강냉이티밥을 먹었어요
아, 너무나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네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귀한 시간이었네요
제게 사랑과 낭만을 보여주셔서 감사해요, 아빠!
여름방학이 되면
예쁜 수영복을 사주시고
김밥을 종합선물세트에 한 상자 가득 싸서
기차를 타고
동해 해수욕장에 데려가주셨지요
한나절 바닷가에서 놀고먹고 웃던 추억...
붉게 노을이 지는 바다를 돌아보면서
아빠의 손을 잡고 기차역을 향했던 걸음...
동해안의 모래와 노을은
제게 한 편의 영화 장면처럼 또렷이 새겨졌어요
그래서 지금도
바다와 모래와 노을을 보면 울컥합니다
아빠!
제 어린 시절에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만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가끔씩 기차를 타는 일이 있을 때
원주역에서 잠시 정차 중에
가락국수를 사러 기차 밖으로 내려가시곤 했는데 아빠가 못 탈까 봐
창 밖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지요
두근두근 긴장되는 시간이었어요
기차가 출발하도록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
아빠 때문에 애가 탔어요
하지만 곧 아빠는 항상 기차문을 열고
우리 자리로 오셨지요
뜨끈한 가락국수 그릇을 두 개 들고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오셨어요
그제야 우리는 안심했지요
자랑스러웠어요, 아빠!
기차 안에서 먹는 그 가락국수는
정말 최고의 맛이었어요
다시는 오지 못할 맛이지요
아빠가 주시는 사랑이었어요
기차 안에서 함께 먹었던
삶은 계란, 귤, 고소미, 깨과자, 사이다는
얼마나 맛있던지요
그때 먹은 것은 지금까지도 다 좋아한답니다
한밤중에 정착역에 내린 후
역전포장마차에 들어가 서서 먹던 가락국수... 고춧가루를 한 숟갈 넣어서
얼큰한 맛을 알게 해 준 아빠가 사 주신 가락국수...
그래서 제게 가락국수는 아빠랍니다
제게 아빠는
그냥 일찍 돌아가신 아빠인 줄로만 알았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가족을 사랑하는 참으로 낭만적인 아빠예요
17년이라는 시간은 짧았지만
크고 예쁜 사랑을 가르쳐 주고 가신 아빠이십니다
아빠를 다시 만난다면
한 번도 못한 말을 할게요
"잘 생기고 낭만이 철철 넘치는 우리 아빠! 매력적인 나의 아빠!
저희에게 아빠는 최고예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저는 아빠를 매일 생각해요
아니, 생각한다기보다
제 가슴속에 항상 붙어 있어요
아빠의 얼굴과 손길이 따라다녀요
눈이 오는 날
비가 오는 날
바람이 부는 날
눈 부시게 푸른 날...
늘 아빠는 하늘나라에서
저를 내려다보고 지켜주고 계신답니다
어디를 가든 따라오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이렇게 오늘처럼
한가득 눈 오는 날은
아빠의 숨소리가 더 크게 들립니다
그때는
제가 어려서
아빠를 안아드리지 못했어요
지금은 안아드리고 싶어도
안아드릴 수가 없네요
그래도 마음으로 힘껏 안아드릴게요
제 아빠이셔서 고맙습니다
아빠, 사랑해요
지금 이 순간에
저를 지켜봐 주고 계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아빠가 살아생전에
가끔 사 주셨던
그 당시 고급 간식인
바나나, 귤, 투게더아이스크림, 찹쌀떡 그리고 초코파이를 먹고 자려고 합니다
아빠도 하늘나라에서 건강히 잘 지내세요
곧 아빠 기일이 다가옵니다
강냉이티밥 많이 사놓을게요
어렸을 때 우리 사형제가
아빠 생신 선물로
방앗간 가서 튀겨온 그 강냉이티밥
그거 말입니다
아빠, 눈이 그쳤네요
내일 또 만나요
잘 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