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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조각글 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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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라 Sep 10. 2023

내가 사랑한 멍청이

The Stupid Whom I Loved

걔가 막 바보는 아니었어. 걔는 방탈출이 취미라서 갈 때마다 항상 신기록을 깨면서 나왔어. 나는 곁에서 ‘방탈출과 관련 없습니다’라고 적힌 소품만 만지작 거리고. 원래도 머리를 잘 쓰는 애였는데,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수학 문제집을 푸는 애였어. 공식에 맞춰서 문제를 풀다 보면 머리가 차분해진다나. 오류가 있으면 곧장 회사에 틀린 풀이라고 제기했지. 이 공식을 대입해서 풀면 계산이 어쩌구 저쩌구. 물론 나는 이해 못 했지. 걔가 글은 영 엉망이었어.


근데 나는 걔가 쓴 연애편지의 틀린 맞춤법과 어색한 표현을 빨간 색연필로 첨삭하고 답장을 써서 줬으니 끼리끼리 만난 것 같아. 내가 걔 자기소개서도 써줬다. 로서와 로써를 헷갈려하더라고. 그리고 때를 떼라고 쓰기도 했어. 맞춤법 책을 주면서 이거 다 읽은 다음에 고백하라고 했는데 효과 없었어.


이과와 문과의 만남이었으니 모든 순간이 달랐어. 세상을 읽는 것도 보는 것도 달랐어. 한 번은 “비열”에 대해 토론을 하기도 했어. 생각하는 비열이 서로 다르더라고. 걔의 비열은 물질 1그람의 1도를 올리기 위한 열량인데 나는 사람의 하는 짓이나 성품이 천하고 졸렬함이었지. 각자 지인이 많은 톡방에 ‘비열이 뭐야?’라고 보내고 답을 기다렸어. 만나는 사람이래 봐야 비슷한 사람일 테니까, 이과의 비열과 문과의 비열이 갈린 답장을 받았지. 그 후로는 틈만 나면 뭔가를 가리키며 “이 물질의 비열을 구하시오”하고 외쳤어. 그럼 걔는 그렇게 쓰는 거 아니야, 하다가도 나중에는 “비열한 문제로군!”했지. 겨울에는 크리스마스 장식이 가득한 거리를 걸으면서 “크리스마스 장식 전구는 병렬연결인 거 알아?”하는 애였어. 그럼 나는 겨우살이 장식의 전구를 가리키면서 “겨우살이 밑에서 왜 키스하는지 알아?”하고 물었지. 겨우살이가 원래 겨울살이에서 비롯된 말이라면서.


새로운 세상을 알아가는 게 즐거웠어. 세상이 계속 넓어졌거든. 인어공주가 물 밖으로 나갈 때마다 인간들의 물건을 가져오잖아.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공부하고 동경하고. 진짜로 인간세계에 갔을 때에 왕자님과 같이 마을을 구경해. 모든 일상을 신기해해. 포크로 머리를 빗지 않는다는 것도, 춤추는 게 뭔지, 불에 타는 게 뭔지 배우면서. 누가 인어공주한테 문화인류학을 알려줬다면 걔는 박사가 됐을 텐데.


내가 그런 기분이었어. 계속 배우고 싶어. 전공으로 삼고 학위를 따고 싶었어. 그러다 언제부터... 뭐랄까, 진짜 걔를 알게 된 것 같아. 영화를 보고 나면 나는 감상을 나누고 싶었는데, 걔는 나만 감상했다는 거야. 이러려고 같이 타임 패러독스를 본 게 아닌데. 연극을 볼 때도 그랬어. 불이 꺼지고 무대장치를 바꾸는 그 짧은 순간 동안 걔는 입술을 찾더라. 문화생활을 즐기고 거기서 오는 생각의 차이를 나누면서 향유하고 싶었는데, 언젠가부터 몸만 찾아와서 싫증 났어. 걔는 영화관을 사방이 막히고 어두운 곳이라 그랬어. 영화관에 가는 건 그런 거 아니겠냐면서. 바보 같아. 이건 너무 쉽잖아. 아무나 할 수 있는 거잖아. 난 좀 더 고차원적인 사랑을 원하는데. 좀 더 특별하고 싶었다고.


우리나라는 구성원과 어딘가 틀어지면 “야! 당장 집에서 나가!!”이러는데, 외국은 “니 방으로 돌아가! 외출 금지야!” 하는 거 알아? 그래서 걔가 그렇게 빈 방에 갇혔지. 왜 그런 시 있잖아.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하는 거. 같은 흐름으로 쓴 시라고 생각했지 난. 걔는 방탈출이 취미라고 내가 말했나? 내 마음속에 영영 가둬두고 싶었는데, 금방 깨부수고 달아났지. 방에서 탈출하지 않는 게 그 방탈출의 해법이었는데. 내가 그렇게 가둔 이유도 맥락도 모르는 멍청이. 텅 비었어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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