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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조각글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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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라 Sep 13. 2023

연꽃 왈츠

A Lotus Waltz

남들보다 손목과 발목이 유독 약해서 삔 자리를 삐고 또 삔다. 믿을 수 없지만 걷다가 덜거덕 하고 발목이 나갔다. 길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아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녹음은 지고 단풍이 드려는데 아직도 인대가 붙지 않았다.


관장님은 전화로 언제쯤 올 수 있어요? 하고 묻고, 

의사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진통제를 처방하며, 

"혹시 선수 준비해요? 태극마크 달고 대회라도 나갈 거예요?" 하고 쏘아붙였다.

 체육관 관장님과 정형외과 의사는 영영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두 조합과 상극의 만남을 좋아한다. 서로 좋아할 수 없는 관계. 불꽃과 불나방, 하와이와 남극 펭귄 같은 거.


네가 준 꽃다발이 그렇다. 꽃을 좋아하지만, 꽃가루는 날 가만히 두지 않는다. 고백할 때 반드시 꽃과 선물이 있어야 한다는 누군가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는지, 어쩌면 드라마나 소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지, 그는 어느 봄날에 꽃을 한 다발 안기며 고백했다. 꽃가루 때문에 숨쉬기 힘들고 눈물이 고였는데, 그는 여전히 내가 벅차서 울먹였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기념일과 생일에 잊지 않고 꽃다발을 사 오는 게 웃기다. 나를 좋아하지만 알고 싶지는 않나 봐. 괜찮다. 나는 꽃가루 알레르기를 앓으면서도 네가 주는 꽃다발을 좋아할 테니까.


나는 꿈과 환상 속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애니메이션 영화들을 좋아하는데, 너는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극한으로 몰려 사람이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디스토피아 영화를 좋아한다. 인간은 조금 더 나은 쪽으로 가려한다고 믿는 나와, 인간의 본성은 추악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너. 

너는 우유급식을 예로 들어줬다. 다음 연도에 어떤 우유를 먹을지 투표할 때 항상 흰 우유를 고르지 않았냐고 물었다. 내가 딸기맛 우유를 먹지 못한다면, 아무도 초코맛 우유를 먹을 수 없거든. 인간의 본성은 그런 거야.라고 말하면서. 사물함에 우유를 두고 졸업해서 새 학기에 후배가 썩은 우유를 버리고 사물함을 청소하게 만드는 것도 인간의 본성이라 그랬다.


그럼 나는 어느 학자 이야기와 같이 본 좀비 영화를 꺼냈다.

바깥에는 언제 그칠지 모르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눈앞에 있는 서적을 땔감 삼아 불을 피운다면 몸이 따뜻할 테지만, 기록을 없앨 수는 없었기에 기꺼이 서적을 품에 안고 얼어 죽은 어느 학자 이야기를 좋아한다. 좀비 바이러스가 퍼져서 궁궐로 악귀들이 쏟아질 때, 죽음이 무서워 덜덜 떨면서도 어진을 끌어안고 최후를 맞이하는 내관들을 얘기했다. 죽어버리면 그만인데, 죽음 앞에서도 저들이 지키려고 하는 게 뭐였을 것 같냐며.


우리도 그렇잖아. 헤어지면 그만인데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잖아. 너는 제일 좋은 꽃을 사 오고, 나는 기꺼이 그 꽃다발을 받는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서로에게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종종 술에 취해 전화할 때마다 "어쩌다 추악한 나 같은 걸 사랑하게 됐어?" 하고 물으면서. 진흙탕의 연꽃이 올해도 잔뜩 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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