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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조각글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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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라 Sep 11. 2023

회고록

Memoir

난 말이죠, 우리의 서사를 좋아해요. 그 서사를 빌려다가 글을 쓸 수 있게 해 달라는 동기들도 많았어요. 플롯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탐낼걸요? 첫사랑을 논하자면, 누군가는 얘기하기 싫다고 하거나, 누군가는 아 그 개새끼?라고 하거나, 누군가는 너무 오래전에 끝나버려서 기억도 안 난다고 하거나, 누군가는 그런 건 드라마 속 이야기라고 해요. 나는 교복을 입던 시절부터 좋아한 원어민 선생님인데, 지금은 세계적인 기업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고, 자주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10년도 넘게 연락하고 있다고 말하곤 해요. 그러면 다들 너무 멋지다면서 부러워해요. 그리고 나는 그 시선을 꽤나 즐기고요.


당신이 그랬잖아요. 모두가 나를 알고 싶어 할 테지만, 정말로 날 만날 수 있는 건 오직 소수의 운 좋은 존재뿐일 거라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어요. 나도 참 행운아예요. 이건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서사가 아니라는 걸 아주 잘 알아요. 그 서사를 전 애인까지도 알아서, 연애하는 내내 걔는 혼자서 당신을 견제했어요. ‘내가 네 첫사랑은 아닐지라도, 너의 끝사랑은 나일 거잖아?’라며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어 하고, 당신이 하와이 출신이라는 걸 알게 된 다음에는 뜬금없이 ‘결혼할래? 신혼여행은 하와이 빼고 어디든 가자’고 하는 게 꽤 귀여운 친구였는데.


궁금해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한 적 있나요? 타지에서 그렇게 알게 돼서 10년이나 연락을 하는 애가 있다고. 걔가 지금은 어떻게 자랐다고. 누군가에게 자랑스럽게 말한 적이 있었을까요? 할 법도 한데, 당신은 나와 달리 겸손한 사람이니까 어쩌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지도요. 어떤 기분이에요? 교복을 입고 꽁무니를 쫓던 아이가 성인이 되어 이제 같이 맥주를 마실 수 있다고 말한 순간은? 나이 든 게 실감 나서 무섭다고 했던 건 기억나요. 내가 쓴 글을 읽는 건 어때요? 이건 이것대로 소름 끼칠까요? 누군가의 첫사랑이라는 건 자랑일 수도 있지만, 그래서 이미 오래전부터 짐작하셨을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과감하게 드러내는 건 거의 처음이잖아요. 이걸 읽고 우리가 어색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내 글이 조금 어려우면 좋겠어요. 번역기가 너무 완벽하게 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너무 바빠서 이걸 읽을 틈도 없었으면 좋겠어요. 근데 또 읽어줬으면 싶기도 하고. 참내, 잠깐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지르고 와도 될까요?


영어를 해야 할 때면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었는데, 당신과 대화할 때만은 즐거웠어요. 다들 나에게 엉망진창이라면서 욕보일 때 당신만큼은 칭찬을 해줘서, 그럼 나는 더 칭찬을 듣고 싶어서, 또 한 번 그런 표현도 아냐면서 놀라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한 번 더 그렇게 머리를 쓰다듬어 줬으면 해서, 사전을 뒤지고 번역기를 돌려보면서 진정한 자기주도 학습을 했거든요. 자기 주도 학습력을 길러주겠다고 지금까지도 말하는 기업체 학원들보다, 나한테는 당신이 더 대단한 사람인 거 알아요? 한 치의 의심도 없어요. 일부러 배려해서 쉬운 문장과 쉬운 어휘만 써준 것 같다고 생각한 적 있어요. 그렇다고 해도 내가 ‘당신도 결국 나를 무시했던 거야!’가 아니라 ‘당신은 역시 참 다정한 사람이야’하는 거예요. 나는 그렇게 스며들었나 봐요.


교복을 입고 당신을 따라다니던 아이가 졸업을 하고, 캠퍼스에서 낭만을 누리고, 다사다난한 연애를 마치고 위로를 받고, 그 언어로 다시 선생질을 하며 첫 돈을 벌어보고, 혼자 해외에 나가 당신에게 배운 말을 잘도 써먹으면서 돌아다니고, 타지에서 원어민 친구도 만들고 현지 택시기사랑 싸워서 이기기도 했다고, 모든 순간이 다 당신 덕분이었다고 말했잖아요. 그럼 당신은 또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고. 내가 참 좋은 아이라며, 나는 항상 영어를 잘했다고 말하잖아요. 그 순간을 몇 번이고 꺼내봤는지 모르실걸요.


당신의 언어를 배우고 사랑하게 됐으니 언젠가는 나의 언어를 알려주고 싶었어요. 내가 왜 국문과에 지원했는지는 이제 알았죠? 그냥 잘 어울리는 학과에 갔다고 생각했죠? 아, 물론 생각이 짧았어요. 정말 제대로 나의 언어를 알려주고 싶었다면 국문과가 아니라 한국어교육과를 지원했어야 해요. 그래도 저번에 ‘무 한 줌’이 뭐냐고 물어봤을 때 내가 검색엔진보다 더 정확히 알려줄 수 있어서 뿌듯했어요.


나는 언어를 배우기도 했지만, 글을 쓰기도 했어요. 내 감성이 좋다는 추종자도 꽤 있었어요. 한 번도 보여준 적은 없지만, 내 글에는 유독 하와이가 많이 등장했어요. 몰랐죠? 당신의 고향은 소재이기도 했고 메타포이기도 했고 장치이기도 했고 그 자체이기도 했어요. 당신의 고향을 가져다가 정말 많은 글을 지어먹었답니다. 글을 쓰는 어떤 선배는 하와이에서 돈 받냐고 하기도 했어요. 이 글을 읽을 쯤엔 당신도 그렇게 느낄 거예요. 내가 진짜로 야무지게 하와이를 가져다가 많이도 글을 썼다는 것을.


해가 바뀌어 Happy new year! 하고, 한 해의 시작을 축하한 뒤에, 올해는 뭘 하고 싶냐고 물었던 적이 있어요. 그때 나는 제법 놀랐던 것 같아요. 갓 고등학교에 들어갔으니 성적을 관리해서 좋은 대학에 지원해야 하는데, 그것만이 삶의 목표였는데 올해는 뭘 하고 싶냐니,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을 하는 게 그냥 신기했어요. 그리고 꽤 깊은 고민을 하게 된 것 같아요. 몇 년 뒤에 또 해가 바뀌고 한 해의 시작을 축하한 뒤에 올해는 뭘 하고 싶냐고 물어서, 나는 또 깊은 고민에 잠겼어요. 당연히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진학이든 인턴생활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다음에는 그렇게 대답하고 싶지 않다고 느꼈거든요. 이번에 또 해가 바뀔 때 그렇게 물어봐 주신다면, 나는 덕분에 하고 싶은 일에 대해 항상 고민할 수 있었다고, 지금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고 대답하고 싶어요.


나는 정말로 우리의 서사를 사랑한다니까요. 새해 첫날에, 추석에, 크리스마스에 인사를 하고, 서로의 생일을 기억해 뒀다가 축하해 주는 것을 잊지 않고, 사건사고를 알게 되면 살아 있는지 확인하고, 벚꽃이 피면 이곳의 봄을 보내고 또 저곳의 봄을 받는 우리의 관계를 좋아해요. 어제는 당신이 좋아하는 멜론 빙수를 먹었다고, 다음에는 치즈 케이크를 추가할 거라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잖아요. 그다음에 요즘은 어떻게 지내냐고 물어보지 말걸 그랬어요. 곧 애인이 생길 것 같아 같은 말을 하면 어떡해요.


하,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줄은 알았어요. 그럼 축하해 주자고 항상 다짐했지만, 쉽지가 않아요. 그래서 내가 펜을 들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글을 쓰는 것뿐이라서. 숱한 밤을 샜어요. 그렇게 뒤척이는 어떤 새벽에는 꽤 좋은 글들이 떠올랐는데, 몽롱해서 어디 메모장에 잡아 두지 못한 게 아쉬워요.


당신이 사랑을 할 때는 어떤 사람일지, 어떤 사람을 사랑할지 늘 궁금했어요. 스스로의 삶을 즐길 줄 알고 사랑하지만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면 더 좋겠다면서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에게 곁을 내주고 함께할 것 같아요. 그게 나라면 어떨까 생각해 본 적도 있어요. 그래요, 떡 줄 놈은 생각도 없는데 김장 먼저 한 적이 있어요. 김장도 다 때가 있는 거 알아요? 입동 전후로 김치를 담가야 맛있어요. 근데 나는 경칩에 배추를 뽑아보고, 처서에 무를 썰어보고, 중복에 찹쌀풀을 끓여보고 했던 거예요. 김칫국 좀 마시겠다고. 잠시만요, 당신 책임도 분명 있어요. 제 덧없는 말에 답도 하고, 실없는 농담에 웃어주기도 했잖아요.


그때 그 첫사랑과 아직도 연락한다고 하면, 종종 몰아가는 친구들이 있어요. ‘그 정도 나이차이는 뭐 차이도 아니지~’, ‘국적과 나이를 뛰어넘는 진짜 사랑이지’ 같은 말을 하더라고요. 그럼 나는 ‘아, 한 번 자빠뜨려 봐?’하면서 정말 다양하게 가정문을 써봤어요. 여러 번 생각해 봤는데 당신의 애인이 되고 싶은 것 같지는 않아요. 우리는 알고 지낸 지 꽤 됐지만, 그래서 서로 최선을 다 하겠지만, 잘 맞을 것 같지는 않아요. 취향이 꽤 다르잖아요. 그리고 그 모든 걸 받아들이기엔 서로의 고집이 꽤 세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사과할게요. 고백도 안 했는데 차이게 해서 미안해요.


음, 행복할 것 같긴 해요. 많은 동화들이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하며 끝나잖아요. 첫사랑과 이루어졌다는 완벽하게 꽉 닫힌 끝맺음을 갖겠지만, 내 삶은 동화가 아님을 알아요. 행복한 결말과 그 이후를 생각하면 나의 행복은 찰나일 것 같아요. 그런 감정은 오히려 행복이기보다는 기쁨일 것 같아요. 혹은 성취감이겠어요. 그 뒤에 허무가 올 것도 나는 잘 알아요. 그래서 행복도 성취도 허무도 갖고 싶지 않아요.


그러면 이게 사랑이야?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는 그 대상도 모르겠어요. 서사를 사랑했는지, 당신을 사랑한 건지, 아니면 순수하게 누군가를 마음껏 좋아할 수 있었던 어린 나를 사랑한 건지. 그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말을 한 곳에 모아 당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어려서 아무튼 사랑의 끝은 연애뿐이라고 생각했나 봐요. 그래서 이 좋아하는 마음이 지칠 때까지 더해봐야 하는지, 아니면 더는 마음껏 좋아할 수 없음에 울어야 하는지 그것도 아니면 혼자 조용히 묻어둬야 하는지 오래도록 헤맸어요.


여기까지 쓰는데 시간이 꽤 걸렸어요. 이렇게 한 글자 적었다가 한 글자 지웠다가 다시 한 글자 적는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감정만 쏟아서 버린 초고가 꽤 되는데, 꽤 많이 건졌네요. 당신에게 애인이 생긴다면, 마음 놓고 시시콜콜한 이 일상을 보낼 사람이 사라진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계속 10년 넘도록 연락할 수 있었던 건, 내가 비겁하게 추억을 볼모로 잡아서 당신의 시간을 축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당신을 잃을까 두려웠어요. 그래서 가져본 적도 없는 것을 뺏긴 공허함을 앓았어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기꺼이 계속 연락을 이어갈 거라고 말해준 밤을 기억해요. 나는 비로소 기쁘게 다음으로 가는 글을 쓸 수 있어요. 나는 정말 진심으로 당신의 사랑과 행복을 응원할 수 있어요. 당신의 행복을 보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일 거예요. 꼭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영원히 행복하게, 그리고 그 너머로. 또는 넘어. 누가 이런 경험을 해볼 수 있겠어요. 그러니 나는 당신에게 항상 고마운 거예요. 이런 순간도 배울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요. 내 첫사랑이 당신인 것을 항상 다행으로 여겨요. 당신이 허튼 마음먹었다면 나는 꽤 재밌는 장난감이 됐을 텐데, 그렇게 갖고 놀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당신도 내게 계속 거기에 있어줘서, 거기서 내 생각을 말해주는 게 고맙다고 했잖아요. 나는 계속 여기에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종종 알려드릴게요. 그럼 거기서 또 들어주셔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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