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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리 Jan 11. 2019

“제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은 다 못 입을 옷이에요.”

30대 중반 직장인 여성 패션 힐링 컨설팅 스토리


01. “뭐가 ‘내 거’인지 모르겠어요.”


저는 34살의 여자 직장인 J입니다. 모 회사에서 리테일 마케팅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꾸미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과장이 되고부터 ‘과장다움’을 요구받으면서 고민이 시작되었어요. 어떤 옷을 입어야할지, 뭐가 저한테 어울리는지 모르겠어요. 쇼윈도 마네킹이 입는 옷만 입었던 거 같아요. 옷장에서 옷이 썩어가지만 ‘옷이 옷장 안에 존재하기는 하니 그만 사야지’ 반쯤 포기하고 있었고요. 뭔가 평상시 옷은 빈곤해져가는 악순환이랄까요. 옷을 ‘안 입으면 안 되니까 입는다’라는 느낌이랄까요. 어떤 옷을 입어도 ‘내가 이게 어울리나?’ 싶은 생각에 항상 자신이 없는 거 같아요. ‘스토리펀딩’ 때부터 글을 흥미롭게 보고 있었어요. 저도 저를 위한 옷, 제가 입고 싶은 옷이 무언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컨설팅의 결정적 신청 계기는 동생이에요. 동생은 저와 달리 옷에 관심이 많고 꾸미기를 좋아했답니다. 그 동생이 올 10월 초에 갑작스런 사고로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이후로 동생의 애정 섞인 잔소리 중 이제라도 무엇을 들어줄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잘 꾸미고 다니는 것’이 생각나더라고요. 또 개인적으로 옷에 대한 고민을 풀고자 전문적인 도움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어떤 옷에 대해선 제대로 욕망한 적도 없고, 그냥 대충 고른 뒤 실패? 하는 것을 반복해 왔던 거 같아요. 뭘 사야할지 잘 모르겠어요. 이 기회에 제가 뭘 좋아하는지 알고, 옷으로 마음이 좋아지는 경험을 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이후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이 이 컨설팅이었다는 J님. 2017년 12월 26일. 드디어 그녀를 만났다. 인사를 건네시는 모습이 활기차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실제로 뵈니까... 되게... 좋네요.”
“성격이 활달하시고 적극적이신 것 같아요.”
“아니에요. 이건 만들어진 자아입니다. 원래 성격은 좀 조용하고 혼자 있는 거 좋아하는데요, 회사 다닌 지는 10년 정도 됐고, 회사에서 처음 맡은 일이 홍보였어요. 전화 받고 응대하고 그러다 보니까 많이 만들어진 것 같아요. 겉으로는? 좋은 가면인 것 같아요. 그래서 회사 사람들은 제가 소심하고 낯을 많이 가린다는 얘길 하면 비웃지만, 그것은 참 트루입니다.”


그러고 보니 입은 웃고 있으나 눈은 아니다. 너무도 슬픈 눈. 외향적인 성격이 좋은 것으로 평가되는 사회생활을 하며, 그녀는 아마도 남들이 모르는 사이 자꾸 속으로 들어가고 있지 않았을까. 옷이라는 영역에서도 그랬다는 얘기가 이어진다.


“약간 옷도 마찬가지인 게... 옷을 동생 이외의 다른 사람과 같이 산다는 걸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친구랑 사는 것도 뭔가 좀 부끄럽고... 뭔가 내밀한 걸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부모님들은 옷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이셨구요. ‘생산성이 없는 짓이다.’ 그 말에 수긍하며 억제하다 보니까 남이 골라주는 옷만 입어 왔어요. 이제 누구랑 같이 옷을 사러가기도 좀 애매하고, 무슨 옷이 어울리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하면 옷을 입을 때 기분이 좋을까도 모르겠고.”


욕망은 밖으로 표현된 후에야 그것에 대한 성찰이 시작된다. 그런데 옷에 대한 욕망을 꺼내어 본 적이 없는 그녀는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욕망인지 알 수가 없다.


“‘넌 얼굴이 귀여우니까 귀여운 옷을 입어야 돼’ 이런 얘길 들으면 ‘난 별로 귀여운 옷을 입고 싶지 않은데 왜?’ 이랬죠. 부모님이 정해놓은 세계에서는 많이 빠져나왔다고 생각을 하는데... 문제는 방법을 모르니까... 두려워요. 차라리 정해진 교복을 입으면 좋을 텐데.”


욕망을 탐구하는 험난한 과정을 거치느니, 차라리 정해진 규칙에 따르고 싶다는 얘기다. 그러나 J님은 옷이 주는 힐링 효과를 어렴풋이나마 느낀 경험이 있었기에 이 과정을 시작할 용기를 내어 보았다.


“그런데 이 ‘옷을 입는 일’이 생산성 없는 일 같지는 않고. 맘에 드는 옷을 입고 정말 기분이 좋을 때가 있었으니까 중요한 일 같고. 그렇긴 한데 ‘망하면 어쩌지?’ 또 ‘너한테 안 어울려 이런 소릴 들으면 어쩌지?’ 두려움이 있다 보니 항상 동생한테 의지했었죠. 지금도 옷은 되게 내밀한 부분이라 공유하고 싶지도 않고 보여주고 싶지도 않아요. 저는 이제 추레하게 입고 다니는 거 그만하고 싶어요.”


내 글 중 가장 인상적인 글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했다.


“샤넬백 팔아버렸다는 얘기? 제가 그 고민을 오랫동안 하고 있거든요. 그것만 있으면 제가 뭐랄까 멋진 여자가 될 것 같았어요. 저는 입사 전까지만 해도 저는 전혀 꾸미는데 관심이 없었거든요. 부모님 때문에. 근데 회사 언니들이 자기를 잘 꾸미고 다니더라구요. 그건 ‘이번에 보너스를 받으면 루이뷔통을 살 거야’ 여기부터 시작하는 거죠. 그걸 계속 보다보니까 ‘나도 하나 있으면 저 언니들처럼 되나?’ 그런 마음이 컸어요. 그래서 옷은 잘 보지 않았지만 가방은 뭐가 새로 나오나 찾아보고... 무리해서 사고. 그런데 그렇게 산 가방들이 내 옷에 어울리지도 않았고 되려 불편하고. ‘아니 그럼 이것들을 왜 산거야?’ 근데 팔아버리자니 왠지 나의 그... ‘내가 저것만 있으면 되게 행복할 것 같아’ 라는 마음까지 싹 다 버리는 것 같고. 고민을 하던 찰나에 ‘이제 샤넬백을 더 이상 메지 않고 팔아버렸다’는 선생님 글을 보고 ‘어? 이걸 어떻게 결심할 수 있지?’ 엄청 신기했어요. 전 좀 미적미적하고 있거든요. 아직도 미적미적 해요.”


미적미적한다는 그녀의 마음을 내가 모를 리 없다. 나도 샤넬백을 중고 명품샵 직원에게 넘기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으니까. 그녀가 말을 잇는다.


“과감히 그게 내 것이 아닌 걸 알고 처분한다? 사실 저는 ‘내 것이 아닌 것’이 뭔지도 모르겠거든요. ‘내 거’라는 건 뭘까? 제가 무슨 옷을 입고 싶어 하는지 그걸 전혀 모르겠는 거예요. 기능적으로 옷을 샀더라구요. 추우니까 두꺼운 걸 사고. 속옷 오래 입었으니까 옷을 사고. 그런데... 입었을 때 하루 종일 기분 좋은 옷이 있긴 있더라구요, 저한테도. 근데 옷장엔 아무 감흥 없는 옷이 너무 많아요. ‘옷이 힐링이 될 수 있을까, 정말?’ 했을 때 그런 옷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앞으로 옷을 살 때 그런 포인트에 집중해서 산다면 돈을 좀 가치 있게 쓰는 게 될 거고. 일단은 ‘옷을 입어서 기분이 좋아지고 싶다’는 마음이에요. 사실, 그 가방들은 가져도 많이 기쁘지 않거든요. 과연 옷을 입는 기쁨이 있는 걸까. 좀 궁금하기도 하구요, 알고 싶어요. 제가 좋아할 옷. 사실 미지의 영역이에요 약간. 그리고 진짜 두려워요. ‘이걸 시도하면 과연 어울릴까?’ 이를테면 배꼽티? 미니스커트에 싸이하이부츠? 그렇지만 ‘아 너무 경박해 보일 것 같아’라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죠. 시도해 보고 싶은 건 많은데 잘 어울릴지... ‘하지 마라’는 마음의 소리도 많고. 용기가 안 나요.”



02 “제가 좋아하는 옷을 고른다구요?”


‘모르겠다’와 ‘두렵다’는 말씀을 반복하는 J님. 그녀를 안심시켜야 할 타이밍이다.


“제가 하는 역할은 ‘잘한다잘한다’ 응원하고, ‘이거 좋아하시는 거예요!’ 옆구리 찌르는 거예요. 강요에 익숙한 분들은 본인이 좋아하시는 것에 대해서 긴가민가하세요. 그걸 끄집어내는 게 어렵지만 결국 나와요. ‘당신은 이런 분이고, 이런 욕망이 있는데 그걸 부끄러워하실 필요가 없어요’라고 말씀드려요. 만약 쇼핑하다 뒤로 물러서려고 하시면 저는 계속 당겨요. 진짜 욕망이 일단 파악되면, 전 타협 잘 안 해요.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건 ‘어울린다’보다 ‘원한다’가 우선이라는 거예요.”


말이 끝나자 그녀를 둘러싼 기류가 뭔가 달라졌다.


“아 그러면 완전히 다른 초이스가 돼요!”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건 본인의 정체성으로부터 ‘원한다’는 옷을 본인의 라이프스타일과 잘 절충해서 입는 거예요. 전 그 아이템이 아니라 그 아이템에 반영된 욕망에 관심을 가져요. 예를 들면 회사에는 배꼽티 못 입고 가지만, 배꼽티에 반영된 욕망의 실체를 파악하면 배꼽티가 아니라 회사에 입고 갈 수 있는 다른 옷으로 풀어낼 수 있죠. 그래서 한 번도 입으려고 생각지도 못한 아이템을 권할 때도 있어요.”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어울린다’의 강요를 경험한 그녀를 위해 말을 이어 나갔다.


“‘어울린다’는 말은 화자의 생각이에요. 근데 그 ‘어울린다’는 말은 화자의 가치를 반영해요. ‘넌 귀여운 게 어울려’는 ‘내 기준에서 너는 귀여워야 해’이죠. 옷을 선택할 땐 주위에 의해서 흔들리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음식은 어때요? 객관적으로는 호텔 쉐프가 만든 요리가 맛있어도, 오늘 내 입에 떡볶이가 맛있으면 그게 최고의 음식이잖아요. 누가 ‘너 왜 떡볶이 먹어?’하면 우린 ‘저 사람 참 별꼴이다’라고 생각하죠?”
“‘별꼴이다’해야 되는데 저는 쪼다같이 옷에서 ‘그러게 난 왜 떡볶이 먹지?’이러고 있었어요.”
“우리의 목표는 내가 원하는 걸 입고 ‘뭐 어때?’할 수 있는 수준으로 자존감이 올라가는 거예요. 제가 미니스커트 입는다고 주위에서 뭐라 그러면 전 ‘그래 입었다. 뭐 어때?’ 해요.”


그녀의 정체성을 파악하기 위해 언제 화가 나시는지 여쭤봤다.


“최근에 가장 화났던 건 상사와의 일이었어요. 제가 3시에 영어 프리젠테이션을 하기로 해서 신경이 날카로와져 했는데 갑자기 12시경, 2시에 업체 미팅을 하자는 거예요. 상사에게 ‘너무 갑작스러워서 당황했다’ 그랬더니 ‘왜 당황하는데?’ 그 말 듣고 너무 화가 났어요. 전혀 제 감정을 받아주지 않으니까. 궁금해서 물어보는 ‘왜’가 아니라 비난의 ‘왜’가 되는 순간 화가 많이 나는 것 같아요. ‘니가 뭔데 당황하고 있냐’ 하는 거요.”


J님의 분노 포인트는 보듬어달라고 약한 부분을 드러냈음에도 무자비하게 더 맞았을 때 ‘왜 때려?’ 욱하는 것이다. 어릴 때 왕따 당한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지만, ‘니가 뭔가 잘못했겠지’에 상처받았던 얘기, 상처만 주던 집을 빨리 나가고 싶어 대학 가서 기를 쓰고 공부한 얘기, 학교 상담소에서 상담 받았던 얘기가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절당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 ‘어울리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런 걸 계속 안고 살았어요. 저는 거의 남한테 맞춰 살았어요.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어릴 때 그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볼 때 좀 관조적이게 되는 것 같아요. 뭐랄까 항상 이만큼... 이만큼 멀찍이 떨어져 있는 사람.”


그런 상처가 본인의 욕망에 주목하기보단 타인이 골라주는 옷에 의존하는 것으로 굳어진 게 아닐까. 그녀에게 ‘아, 내가 살아있구나!’의 순간은 언제일까?


“목욕탕에서 떼 밀 때. 그건 저에게 정말 신성한 행위입니다.”


그녀는 누군가 손으로 뭔가를 해줄 때 행복을 느낀다. 맛사지도 같은 맥락. 어쩌면 ‘넌 소중한 사람이야’라는 말을 그렇게 듣고 싶은 것이다. 그녀의 화려한 손톱이 눈에 들어온다.


“맛사지 샵에서 엉엉 운 적이 있어요. ‘난 정말 공주가 되고 싶었는데 공주처럼 자라지 못했구나’ 그런 심정. 그리고 춤추거나 노래할 때. 또... 올해 회사에서 10년차 휴가를 내고 혼자 프랑스 니스에서 한 달 살아보기를 해봤는데 삼시세끼 챙겨먹은 거 말고 한 건 없거든요. 박물관에 간 것도 아닌데, 삶의 주도권이 온전히 나에게 있을 때? 살아있다고 느꼈어요.”


그녀는 ‘개인주의자’ 같다. 예민하기 때문에 자신의 내밀함을 침범 당하거나 상처받을지 몰라 숨고 있지만, 누군가 찾아와선 ‘그래 넌 참 소중한 사람이야’라는 공감을 해주길 바라는 분. 속박 받고 싶지 않기에 온전히 혼자만의 자유로운 순간에 살아있음을 느끼는 분.


회사에서 일하실 땐 무엇을 중시하시는지 여쭤봤다. 새로운 경험을 할 것,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할 것, 나에게도 그리고 남에게도 도움이 될 것. 아름다움이 지상 최대의 미션인 개인주의자 성향이 일할 때도 나타난다. 일할 때 기준은 다른 질문과 달리 막힘없이 나오는 걸 보니, 그리고 대학 시절 세 가지나 전공으로 공부한 점을 봤을 때 그녀는 개인주의자이면서도 성취자형의 성향을 가진 분 같다. 나는 그녀에게 에니어그램에서 이런 유형을 부르는 별칭이 바로 ‘귀족’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 수줍어하실 거라는 내 예상과 정반대의 반응이다.


“귀족이요? 어... 그 말 정말 맘에 들어요. 귀족... 귀족이라... 생각해보니까 마음 한 구석에는 늘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제 헤어질 시간. ‘나만의 곡’, ‘버킷리스트’, 좋아하는 영화, ‘왠지 끌리는 룩’ 숙제를 내드렸다. 뭘 좋아하는지 모른다는 J님께 각별히 신경 써서 ‘왠지 끌리는 룩’ 고르는 법을 설명 드렸다. 이 숙제는 그림 감상자의 관점에서 패션 사진을 고르는 것이다. 미술관의 그림을 ‘사다’의 대상으로 생각하면 너무 고르기 어렵지만 그냥 ‘아 이 그림 좋다’라고 감상만 하면 거리낌이 없어진다. ‘입다’가 아니라 ‘보다’일 때 순수하게 아름답다고 느끼는 옷.


“아... 그럼 못 입을 옷을 많이 고르게 될 것 같아요.”
“괜찮아요! ‘그 옷을 입을 수 있게 어떻게 풀어볼까요?’가 제 미션이니까요. ‘이 분 어떻게 입어야 행복할까’이지 ‘이분 어떻게 입어야 무난할까’가 아니에요. 절대 눈치 보지 마세요. 너무 평범하면 빠꾸시킬 거예요.”
“아니... 너무 평범하지 않을 것 같아서... 좀... 혹시... 컬렉션 북에서 골라도 되나요? 관심은 많아서 잡지를 자주 보기는 해요. 항상 사는 게 보그에서 분기마다 한 번씩 주는 컬렉션 북이에요. 거기서 ‘그냥 좋다’랑 ‘입을 수 있다’는 진짜 다른 것 같아요.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녀가 매 시즌 컬렉션 북을 모으고 있었다니! 상당히 의외임과 동시에 상당히 고무적인 사실이다. 역시. 욕망은 억제될 뿐 부재하지 않는다.


“아... ‘그냥 좋다’인 그림이라고 생각하니까... 되게 신기하네요. 생각만 해도 힐링이 돼요. 옷을 그림으로 볼 수도 있구나! 좋아했던 건 되게 많거든요. 동생 가고 나서... 너무 비싸서 다시 태어나야 살 수 있을 것 같던 이 C 시계를 샀어요. 뭔가 홀린 듯이. ‘이렇게 사람이 허망하게 죽는데 이건 가져야겠다’ 그거 말고는 다 기능적인 소비였는데... 좋아하는 그림의 옷을 선택한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좋아요. 선택은 자유니까! 그래도 그게 나일 테니까!”


그녀의 얼굴 광채 레벨은 ‘원하는 옷’ 얘기가 나온 순간부터 상승하기 시작했는데 결국 10점 만점에 9점이 되었다. 이미 그녀는 원하는 옷 입기를 시작한 셈이다. 그나저나 C 시계라니. ‘귀족’ 맞다.




03 “제 별칭은요...”


2017년 12월 30일. 두 번째 만남. 한층 생기 있어 보이는 그녀. 다른 사람 같다. 첫 만남 이후 뭔가 자신의 분위기가 반전됐다는 간증(?)과 더불어 숙제를 정말 신나게 하셨다고 밝힌다. J님은 스케치북을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스케치북을 펼치자 컬렉션북에서 오린 사진들이 가지런히 붙어 있었다. 정말 즐기신 듯하다. 그런데 이번 시즌만 스크랩해 오신 게 아니었다. 그녀는 몇 년 간 컬렉션 북에 내밀히 자신의 욕망을 표하고 계셨다.



지난 번 말씀하신 대로 정말 그대로 입을 수는 없을 것 같은 룩이 대부분. 얼핏 J님의 외모만 본다면, 그 안에 이런 옷이 존재한다는 걸 전혀 예상할 수 없다. 겉모습은 그냥 열심히 회사 다니는 똘똘한 30대 여성일 뿐이다. 낭만적인 로코코 무드가 스케치북 속 작은 사진 하나하나에서 살랑거린다. 레이스, 쉬폰, 리본, 플라워 프린트 드레스, ‘은하철도 999’의 메테르가 입었음직한 퍼 장식 코트까지. 이런 옷들이 기능적인 옷만 입어온 그녀의 마음속에 꽁꽁 숨겨져 왔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런 욕망과 ‘귀족’ 정체성은 뭔가 불가분의 관계 같다.


버킷리스트의 일부는 이렇다. 세계 여행, 편지쓰기, 그림일기 쓰기, 춤 배우기, 책 읽기, 사랑하는 사람들과 밥 먹기, 슬퍼하면서 엉엉 울기, 강아지랑 산책하기. 소소하지만 아름다운 일들을 조용히 하고 싶으신 것 같다.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 몇 곡에는 케이윌의 ‘Love Blossom’, 아이유의 ‘팔레트’, Parsi Match의 ‘Shala-La-La’ 같은 달콤하고 낭만적인 곡도 있고 린킨 파크처럼 반항적이고 강렬한 곡도 있다. 좋아하는 영화에는 ‘노팅 힐’, ‘호우시절’과 같은 낭만적인 것도 있고, ‘오페라의 유령’, ‘맘마미아’도 있으며,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비긴 어게인’ 같이 소심한 누군가가 용기 내서 도전하고 뭔가를 이루는 줄거리의 영화도 있다.


음악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녀가 벌써 자신의 별칭을 생각해 봤단다. 지난 번 만남 이후로 ‘귀족’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귀족을 그대로 별칭에 쓰고 싶다는 뜻을 전하신다. 그리고 앞의 수식어까지 붙여서 정해 보셨단다.


날라리 귀족


귀족은 겉으론 아무 것도 안하는 종족 같지만, 봉건시대 귀족은 영토를 지키는 대가로 땅을 받은 영주들이었다. 그녀는 회사에서 치열하게 일하고 그 결과 누군가의 케어를 받는 자신이 귀족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하신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귀족’이 너무 마음에 드신다나. ‘디올’의 ‘쟈도르’ 광고에서 모델이 금빛 물결을 가르며 찰랑찰랑 걷는 그 영상이 자신을 매우 잘 표현하는 이미지 같다는 말씀. ‘물 위를 걷는 귀족’도 생각해 보셨다는데 나는 ‘귀족’이란 표현에 그 이미지가 다 포함되니, ‘귀족’을 상반된 다른 어휘와 조합하자고 제안했다.


그렇다면 다시 ‘날라리 귀족’이다. ‘날라리’는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의 권위에 저항하기도 하는 그녀의 성향을 표현한 단어이다. 그러고 보니 버킷리스트에는 ‘나를 괴롭히던 사람 엿 먹이기’도 있다. 그녀가 카카오톡에서 즐겨 쓰는 ‘최애’ 이모티콘은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에비츄’라는 귀여운 고양이 캐릭터인데, 보기와 달리 살짝 변태적이며 엉뚱한 데가 있다. ‘날라리’는 경쾌한 소리를 내는 ‘태평소’의 우리말 명칭이기도 한데, 춤추고 노는 풍류를 즐기는 자신과 ‘태평소’의 유사점이 있음을 밝힌다. 여기까지 너무도 흥미롭게 듣던 나에게 갸우뚱하시며 잇는 말씀. 아직도 ‘날라리’가 확실한지는 잘 모르겠다는 결론. 나는 앞으로 더 생각해 보자고 했다. 원래 자기 자신을 완전히 안다는 게 평생 불가능한 것 아닌가.


어쨌거나 ‘뭘 입어야 할지 모르겠다’, ‘내 거가 뭔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반복하시던 분이 단 며칠 만에 본인이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귀족’, 그리고 ‘날라리’라고 부르게 된 대반전이라니. 브라보!




04 “샤넬백을 못 팔겠어요.”


2018년 1월 7일. 세 번째 만남의 시간. 그녀는 금단추가 있는 타이트한 네이비색 피코트에 샤넬백 차림으로 나타났다.


이번 숙제는 ‘왠지 끌리는 배색’을 골라 오는 것, 그리고 옷장 속 소장 아이템의 사진을 입고 착용 컷을 찍어오는 것이다. ‘왠지 끌리는 배색’은 다음과 같다. 연보라와 핑크가 주요 색상인 ‘고요한 침묵의 컬러’ 배색에서는 ‘귀족’이, ‘즐거운 목욕 시간’ 배색에서는 ‘날라리’가 있는 것 같다.


상) 고요한 침묵의 컬러, 하) 즐거운 목욕 시간 (출처 :  <다양한 분야에 도움이 되는 배색사전>(구노 나오미 외, 2015))


두 번째 배색인 ‘즐거운 목욕 시간’을 보시며 ‘귀족’님이 하시는 말씀. 나중에 전국의 온천을 유랑하실 계획인데, ‘고독한 미식가’처럼 ‘고독한 목욕가’가 되어 보시겠단다. 너무 기발하고 웃겨서 깔깔 웃다 문득 동행하고 싶어졌다.


이젠 소장 옷 착용 컷을 볼 차례. 그녀가 보낸 압축파일을 열었다. 나는 그렇게 꼼꼼한 숙제는 본 적이 없다. 우리가 만난 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봄/가을, 여름, 겨울 옷이 폴더별로 정리되어 있었고, 가방과 신발도 각각의 폴더로 정리되어 있었다.


내가 소장 아이템 사진을 착용 컷으로 부탁드리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개별 옷의 착용 시 핏과 길이를 알아보기 위함, 둘째 체형을 파악하기 위함이다.


옷을 바닥에 펼쳐놓고 사진을 찍으면 그 옷이 몸에 어떤 핏으로 맞는지 길이는 몸의 어느 정도에서 끝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옷을 입고 찍으면, 옷 자체로는 아무 문제가 없던 옷이 왜 이상했는지 진단이 가능하다. 그녀의 옷은 상하의를 막론하고 붙는 핏이었다. 상하의 모두 붙는 핏이면, 각각의 옷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대신 토털룩에 문제가 생긴다. 상하의가 모두 한 방향인 투머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투머치는 요란한 걸 의미하기도 하지만, 내 경우 어느 한 방향으로 치우친 룩을 투머치라 부른다. 컨설팅을 하며 내가 꽤 자주 목격하는 건, 착용 컷을 찍어 본 후에야 자신의 소장 아이템으로 조합했을 때 토털룩이 이상했던 이유를 발견하시는 모습이다. 핏 투머치에 대해 그녀가 입을 연다.


“예전에 뚱뚱하다고 엄청 놀림 받았거든요. 그래서 다이어트도 했지만... 그 이후로 뭔가 반작용처럼 ‘나 이제 붙는 옷 입을 수 있어!’ 이런 맘이 많았던 거 같아요. 그게 어떻게 보일지 보다는 그냥 꾸역꾸역 입는 거요. 찍어놓고 보니 쫄쫄이들만 있네요.”
“이젠 사이즈가 아니라 핏에 욕심낼 차례입니다. 전, 남자 스웨터 라지 입는 여자!”


한편 원피스 사진을 살펴보니, 체형의 장점을 살려주지 못하는 핏인 것, 퍼프 소매로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는) 귀여운 무드인 것, (날라리답지 않은) 고분고분한 디자인인 것이 많았다. 플리츠스커트는 키에 맞지 않는 길이와 칙칙한 색상 때문에 어색했다. 그런데! 착용 컷 사진 속 그녀는 각선미의 여인이었다. 나는 눈을 반짝이며, 미니스커트에 싸이하이부츠를 신어도 절대 민폐가 아니니, 이건 꼭 해보자고 말씀드렸다.


그날 입고 오신 피코트 얘기가 나왔다. 뭔가 애매한 옷이라 사진보단 실물로 보여주시기 위해 입고 나오셨단다. 찬찬히 살펴보니, 코트 속 스웨터 때문에 암홀 주위 소매 부분에 주름이 있었고 어깨 부분이 너무 타이트해서 보는 사람까지 불편하다. 입는 사람이 불편한 건 말할 것도 없겠다. ‘귀족’ 님의 체형을 고려했을 때 앞으로 하의를 슬림하게, 상의를 헐렁하게 입는 게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며 그 피코트와의 이별을 권했다.


‘왠지 끌리는 배색’을 기준으로 소장 옷의 색상을 체크해 보았다. ‘귀족’님 옷은 거의 검정색이었다. ‘왠지 끌리는 배색’에 해당하는 색은 옷장에 거의 없다. 색상이 주는 힐링 효과는 생각보다 대단한데, ‘귀족’님의 배색을 보니 옷을 입으며 마음이 즐겁지 않았던 이유를 알겠다. 피치색 재킷이나 핑크 코트가 없는 건 아니지만, 하의는 대부분 검정색이다. 하의가 밝은 베이지나 밝은 그레이로 바뀌기만 해도 핑크 코트는 살아난다. 그녀가 화사한 겉옷을 입고 거울을 봤을 때 왠지 이상했던 건 당연하다. 그건 핑크 코트가 안 어울려서가 아니라, ‘귀족’님 옷장엔 핑크 코트와 함께 입을 수 있는 색상의 하의가 없어서였다.


전반적으로 그녀의 옷장에는 서로 조화롭게 조합할 옷들이 있기보단 개별 아이템의 특징이 뚜렷한 옷이 많다. 기본 아이템도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어떤 일관적인 맥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날의 주요 주제는 옷도 옷이지만 가방이었다. 샤넬백 뿐 아니라, 셀린의 백도 다수 보였다. 그 나이대 직장인 여성들이 선망하는 브랜드의 가방들이다. 대부분의 가방은 무겁고 뭔가 형태가 불편해서 잘 안 든다고 하신다. 가볍고 작은 에코백이 그녀가 애용하는 가방이다. 그녀는 검정색 같은 어두운 색을 좋아하지 않는데 비싼 가방들은 대부분 검정이다. 그럼에도 아직 ‘귀족’님은 아직 팔 자신이 없다. 내가 이제 조금 강하게 얘기할 차례가 왔다.


“자, 얘네들 지금 안 들죠? 제가 말씀드릴게요. 이거 나중에 못 팔지도 몰라요. 이게 지금 아직 트렌디할 때 내놔야 팔려요, 그나마 괜찮은 가격에. 나중에? 그 땐 이미 늦어요. 트렌드는 이미 지나간 상태거든요. 물론 지금 내놔도 사신 가격에 비해서는 못 받거든요. 그래도 지금 팔아야 돼요. 그 가격에라도 지금 팔면 하나 판 돈으로 기분 좋게 들 수 있는 더 저렴한 가방 몇 개나 살 수 있어요. ‘아깝다’가 아니라 ‘기쁜가’ 그것만 생각해보세요.”


우린 그 가방들이 ‘귀족’의 정체성을 세밀하게 표현해주는 가방이라기 보단, 그냥 (남들이 다 사는 안전한 색인) 블랙의 (남들이 선망하는) 비싼 가방임을 함께 얘기했다. 그녀는 이내 자신이 정말 들고 싶은 가방의 조건을 말한다. (1) 내용물에 접근성이 좋을 것. 뚜껑을 열기 편하다든지, 속이 깊지 않다든지, 지퍼를 열기 편하다든지. (2) 핸들과 크로스 둘 다 가능할 것. (3) 최소한의 소지품만 들어가는 가볍고 작은 가방.


나는 그녀와 헤어지며 중고 명품 사이트를 소개해 주었다. 며칠 후 그녀는 몇 가지 가방을 위탁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녀는 내 책에 소개된 스타일링 법칙으로 옷장 속 아이템들을 최대한 살리는 시도를 해 보았고, 본인 옷으로는 ‘반대의 법칙’을 적용하기가 쉽지 않더라는 피드백을 주셨다. 그리고 마케터답게 패션 마케팅을 파보시겠다는 ‘날라리’다운 포부를 밝힌다.


“이놈들이 나한테 옷을 어떤 식으로 팔고 있었나. 이제 당해주지 않겠다... 이런 굳은 결심이랄까. 이번에 가방들 반도 못 받는 거 보고... 이제 남들이 말하는 거 보단 제가 원하는 의생활을 하도록 해보겠습니다. 그나저나 제 옷들은 참... 배색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제가 패션 테러한 거 맞는 거 같아요.”



05 “쌤... 이거슨 뭔가 많이 오글거려요.”


하루는 ‘귀족’님이 뭔가 고백한다. 나와 쇼핑할 날까지 못 참고 뭔가 사셨다는 것이다. 그녀의 ‘왠지 끌리는 룩’에 포함되었던 검정 망사 드레스와 거의 같은 원피스였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해도 된다는 내 말에 너무 필 받은 나머지 ‘왠지 끌리는 룩’을 그대로 옮긴 듯한 옷을 사 버린 거다. 나는 ‘왠지 끌리는 룩’에 반영된 욕망은 존중받아 마땅하나, 현실적으로 일상에서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라면 사지 않는 게 좋겠다는 편이다. 이번 일로 ‘귀족’님이 많은 걸 배우셨으면 그걸로 됐다(이 옷은 몇 달 후 내 유튜브에서 ‘잠자는 옷 살리기’ 소재로 등장했다).


이제 내가 그녀의 욕망, 정체성, 배색, 체형, 라이프스타일, 소장 아이템 등을 고려해 콜라주를 제작할 차례다. 쇼핑 날짜가 다가올수록 그녀는 설레는 마음인지 공부도 열심히 하고 옷에 대한 자신의 의견도 열심히 전한다. 내 블로그에 있는 화이트 코트에 핑크 머플러가 포함된 콜라주가 맘에 드신단다. 사실 이건 내가 세 번째 만남 때 입었던 룩과 거의 같다.



“볼 때마다 느므 이쁜 거 같아요. 게다가 회사에 입고가기도 좋을 거 같고! 근데 저 코트는 볼 때마다 귀족스럽네요.”


회사엔 입었을 때 기분 좋은 옷을 거의 입고 가본 적이 없는 ‘귀족’ 님. 그녀는 출근복도 충분히 아름답고 힐링되는 옷으로 선택할 수 있음에 처음으로 눈을 뜬 것이다.


콜라주 작업은 정말 늘 고된 작업이지만 이렇게나 들떠하시는 모습에 나도 힘을 내게 된다. 나는 그녀가 선망하는, 발레리나들이 입을 법한 망사 스커트를 일상에서 입을 수 있게 룩을 짜보았다. ‘귀족’님은 키가 그리 큰 편은 아니지만 다리가 예쁘기 때문에 미니 길이의 스커트를 선택해 보았고, 그것만 입으면 부끄러울 수도 있기에 그 위에 화이트 셔츠 드레스를 덧입는 게 어떨까 했다. 대신 셔츠 드레스의 아랫단 단추를 3개 정도 풀어서 걸어 다닐 때마다 망사가 살짝살짝 드러나게 되는 거다. 이렇게 되면 하의로 입은 망사는, 남들은 몰라도 본인만큼은 로코코 무드를 즐길 수 있는 비밀스런 장치 같기도 하다.


그리고 허리를 벨트로 묶어 줌으로써 ‘왠지 끌리는 룩’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리본 욕구를 해소시켜 보았다. ‘귀족’님이 추위를 많이 타기 때문에 보온을 위해 싸이하이 부츠와 카디건을 더해 보았고, 그레이 코트와 핑크 아이템을 더하여 몽환적인 분위기이지만 너무 튀지 않게 룩을 구성했다.


동남아시아 국가로 출장을 자주 다니는 ‘귀족’님을 위해 이것을 여름 버전으로도 풀어 보았다. 이 경우 화이트 민소매 티셔츠를 상의로 입고, 롱셔츠를 걸친 후 단추를 모두 오픈하여 아우터로 입는 것이다. 배색을 완성하기 위해 라벤더색 스니커즈와 민트색 크로스백을 더해 보았다.


이런 구상을 하고, 온라인 쇼핑몰을 둘러보다 이 망사 미니 스커트가 자라 키즈에 딱 하나 남은 걸 발견. 자라 키즈의 13-14세 옷은 키 164 기준이기 때문에 키가 크지 않은 성인이라면 도전해 봄직 하다. 나는 쇼핑 날이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온라인에 딱 하나 남은 것을 빨리 사시라고 재촉했다. 그런데 그녀의 저항이 만만찮다.


“허걱... 쌤님요. 이거슨 뭔가 많이 오글거려요.”


토털룩을 아직 보지 못한 그녀가 내 의도를 알 리가 없다. 절대 그건 단독으로 입을 용도가 아니니 믿어 달라고 말씀드렸다. 스타일링은 내게 맡기라며 이 콜라주만 살짝 보여드렸다.


“하나만 봤을 때는 오글! 이랬는데 저렇게 토탈룩으로 보니까 진짜 이뻐요!”




06 ‘귀족’적인 출근복




계속해서 나는 그녀를 위한 출근룩을 짰다. 우선 ‘왠지 끌리는 배색’으로 출근 룩의 기본 아이템인 슬랙스와 기본 코트를 넣었다. 그녀의 ‘왠지 끌리는 룩’에서 소매 끝과 칼라에 퍼로 장식된 코트를 떠올리며 라벤더 색 퍼 장갑을 찾아냈다. 이렇게 되면 디테일 없는 기본 코트에 장갑이 더해져 소매에 퍼가 장식된 코트를 입은 것 같은 기분을 즐길 수 있다. 그리고 로코코무드를 절제해서 누리도록 햄라인이 페플럼으로 마무리된 니트 탑을 넣었다. 이런 느낌의 원피스를 사면, 출근할 때 너무 ‘멋냈다’ 느낌이라 불편할 수 있지만, 페플럼 니트를 입고 그것과 상반되는 분위기의 직선 실루엣 슬랙스를 매치하면 ‘반대의 법칙’이 적용되어 절제된 멋을 즐기는 ‘귀족’이 된 기분일 것이다. 여기에 ‘날라리’ 무드를 더하기 위해 (그리고 디자이너 브랜드를 사랑하는 ‘귀족’ 정체성을 반영하여) 알렉산더 맥퀸의 크로커다일 패턴 핑크 크로스백을 선택하고, 배색을 완성하기 위해 하늘색 머플러를 더했다.



다음으로 그녀의 레이스 욕망을 풀어낼 차례. 그 욕망은 레이스 블라우스로 시도해 보았다. 마침 마시모두띠에서 라운드 넥의 레이스블라우스가 발견됐다. 만약 레이스 블라우스의 소매 나팔이 너무 과하면, 밥 먹다 국에 빠지기 딱 좋다. 반면 이 기특한 블라우스는 소매 끝자락이 나팔처럼 퍼지는 정도도 딱 알맞다. 여기에 배색을 고려함과 동시에 핑크 슬랙스와 블루 새틴 팬츠를 더해 보았다. 아우터는 그녀가 ‘귀족적’이라고 감탄했던 아이보리 코트를 포함시켜 보았고, ‘날라리’의 경쾌한 무드를 더하기 위해 샵밥에서 STAUD의 하늘색 원통 백을 찾아냈다. 레이스 블라우스를 매일 입을 순 없으니 그녀의 배색에 포함된 파스텔톤의 디테일 없는 셔츠 스타일의 유니클로 레이온 블라우스를 이 콜라주에 함께 포함시켰다. 이런 블라우스를 색상별로 사놓고 돌려 입으면, 디테일이 없으므로 싫증나지 않고, 본인이 원하는 색상이기에 남 칭찬 듣지 않아도 매일 기분이 좋다.

아이보리 코트와 핑크 머플러 룩을 만들어 보았다. 각선미의 여인인 그녀를 위해 다시 미니스커트 룩이다. 싸이하이부츠와 민트색 미니스커트에다가 다른 콜라주에 등장했던 아이템을 다시 소집시켰다. 같은 아이템이지만 새로운 룩이 나온다. 완성도가 높은 원피스 한 벌이 아니라 개별 아이템을 사면, 레고처럼 다양하게 조합이 가능해서 토털룩의 경우의 수는 늘어날 수 있다. 나는 내 콜라주를 참고해서 앞으로 그녀가 홀로 본인의 룩을 만들어 갈 수 있기를 기대하며 작업을 마쳤다.



드디어 쇼핑 전날이 되었다. 많이 설레어하는 그녀에게 말씀드렸다.


“귀족이 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시구요, 주는 대로 입을 것. 선서!”
“엄청 기대돼요. 주는 대로 입겠습니다. 선서!”


우리는 1월 어느 주말 아침 하남의 쇼핑몰에서 만났다. 평소 입을 옷이 전혀 없다던 그녀는 정말 까만 쫄쫄이 추리닝 차림이다. 내가 밤새 완성한 콜라주를 확인한 그녀는 이미 흥분상태다. 샤넬백이 벌써 팔렸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 돈으로 콜라주에 있는 모든 아이템을 다 살 기세다.


우리는 먼저 ‘앤아더스토리즈’에 들렀다. ‘앤아더스토리즈’는 로코코 무드를 즐기는 그녀의 취향이 가득한 브랜드이다. 콜라주에 포함된 머플러와 장갑을 실물로도 볼 겸, 콜라주에 포함되지 않은 의외의 아이템을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양한 아이템을 시도해 보았는데 여기서 우리는 ‘귀족’적인 금색 플리츠스커트를 찾아냈다. 얇고 하늘거리며 은은히 빛나는 플리츠스커트에다 나는 하늘색 오버사이즈 스웨터를 시도해 볼 것을 권했다.



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스커트의 반짝거림과 스웨터의 포근한 느낌이 상반되어 너무나 멋스러웠다. 물론 스커트 길이는 수선하면 더 좋겠다. 또 구매하진 않았지만, 실크 블라우스도 입어 봤는데, 정 사이즈인 38보단 어깨선에서 2센티미터 정도 내려오는 42사이즈가 멋스러웠다. 거울로만 봤을 땐 몰랐던 핏의 한끗을 사진으로 비교해서 보여 드리자 ‘귀족’ 님은 신기해하신다.


다음으로 우린 유니클로로 향했다. 유니클로에선 매 시즌마다 다양한 색상의 레이온 블라우스와 다양한 색상의 스마트 앵클 슬랙스가 출시된다.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원단이나 바느질, 핏이 나쁘지 않은데다 물빨래까지 가능해서 직장인들이 데일리로 입기에 좋다. 디테일이 없어 스타일링에 방해되지 않고, 색상이 다양하다 보니까 배색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우리는 이곳에서 밝은 색 슬랙스를 샀고, 파스텔톤 블라우스를 색깔별로 다 샀다. 여기서도 정사이즈인 미듐을 사지 않고 엑스라지를 선택했다. 엑스라지 사이즈를 입었을 때 옷의 핏과 몸의 핏이 대비되어 더 멋스러워 보였다.



이후 코스(cos)에서는 민트색 미니스커트와 여름룩 아우터용 롱셔츠, 오버핏 아이보리 스웨터, 페플럼 니트, 리틀 화이트 드레스를 겟. 젠틀몬스터에선 ‘귀족’의 카리스마를 보여줄 선글라스를 찾는 게 목표였는데, 나처럼 약간 사각턱인 그녀를 위해 위는 넓고 아래는 좁은 테를 골랐다. 마시모두띠에선 레이스 블라우스와 블루 새틴 팬츠를 입으며 함께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녀는 콜라주에 포함된 옷을 매장에서 발견하면 망설이지 않고 다 구매했고, 매장에 없고 온라인에만 있던 제품들은 구매한 후 실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환불한다는 생각으로 빛의 속도로 온라인 쇼핑도 마쳤다. 그녀의 차 트렁크는 쇼핑백으로 가득 찼다. ‘모르겠다’는 말을 반복하던 그녀는 코믹한 표정으로 내게 차 트렁크 앞에서 사진 촬영을 요청했다.



07. "나다운 것이 가장 좋은 거!"


다음 날, 하루 종일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메시지 폭탄이 간헐적으로 쏟아졌다.


“대박이에요!!! 이게 옷 입었는데 피식피식. 뭔가 기분 되게 좋고 날아다니고 있어요. 교주님 여러모로 사랑해요!”
“오늘 친구들 만났는데, 옷 잘 입었다구 해서 뿌듯했어요. 유리천국 불신지옥!”


그녀는 혼자서 콜라주에 포함되어 있던 나머지 아이템을 사기 위해 시내 주요 백화점과 면세점, 해외 쇼핑몰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싸이하이부츠에 대한 욕망을 해결하고자 간 스튜어트 와이츠만 매장에서 난생 처음 검정이 아닌 그레이 부츠를 신어보곤 자신의 배색에 검정이 들어설 자리는 없음을 선언하기도 했다. 나는 ‘귀족’님의 엄청난 추진력에 깜짝 놀랐다. 무서운 여자야.


검정 부츠와 회색 부츠의 비교 사진


며칠 후 ‘귀족’님은 동남아 국가 출장을 떠났고, 2주간의 출장을 마치고 돌아와서 뜻밖의 고백을 해왔다.


“저 이번 출장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힘들었거든요. 마음이 되게 안 좋아서. 회사 그만둘 생각도 몇 번이나 하고... 그때마다 옷의 좋은 기운을 떠올리면서 의지했어요. 선생님 고마워요. 그래도 제 옷이... 갑옷이 돼 주었어요. ‘나는 괜찮다. 괜찮다. 자신감이 있다’ 하고 되뇌게 되는 거요. ‘옷으로 힐링이 과연 될까?’ 했는데 정말 그게 가능했어요. 사랑해요, 갓유리!”
동남아 출장 중인 그녀가 보내준 사진


몇 주 후, 우리는 아울렛에서의 겨울 아우터 쇼핑을 끝으로 컨설팅을 마무리했다. ‘귀족’님은 이제 내 도움 없이도 ‘귀족’을 표현하는 옷과 ‘날라리’를 표현하는 아이템을 믹스해서 자신을 표현하는 참 재미를 누리고 계신다. 뿐만 아니라 매일매일 자신의 의생활을 포스팅하는 패션블로거로 왕성한 활동 중이다. 이젠 비싼 가방 대부분을 팔아버린 그녀가 내 유튜브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그간의 변화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제가 샤넬백을 메고 다녔을 때는 사람들이 그 백에 관심을 갖는 것이 부담스러웠었어요. ‘어머, 샤넬 메고 왔네. 비싼 백 메고 왔네.’ 그러면 좋기도 했지만 부끄럽기도 했어요. 사람들이 그걸 알아본다는 게. 근데 요즘은 제가 고른 어떤 ‘날귀’스러운 아이템을 입고 가잖아요? 사람들이 그걸 가지고 예쁘다고 하거나 좋은 평가를 해주면 기분이 좋기만 해요. 나다운 것이 가장 좋은 거! 디자이너 브랜드에 기댄 것이 아닌 거죠.”


컨설팅 이후 '날라리 귀족' 님이 내게 자랑하던 자신의 토털 룩 사진
그녀가 최근 힐링이 필요하다던 날 다시 입은 캉캉 미니스커트 룩


지난 9월 나와 함께 교토 여행을 간 그녀는 그즈음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며 마음이 복잡했다. 난 그 때도 하나만 생각하자고 말했다. ‘날라리 귀족’에게 ‘아깝다’가 아니라 ‘기쁜가’.


아라시야마를 함께 산책하던 그녀. 뜬금없이 내책 <오늘 뭐 입지?>의 마지막 문장을 인용한다.


쌤, 저 있잖아요. 10년 후의 제가 진짜로 기대된다니까요!














http://blog.naver.com/sujy62/221803459109





‘날라리 귀족’님이 가장 인상깊게 읽은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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