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도 눈싸움을 하고 싶단 말이다!
우리는 너무 많이 생각하고, 너무 적게 느낀다.
– 찰리 채플린 –
예전에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이 깜빡이기 시작하면, 어른들이 왜 그냥 멈춰 서는지 말이다. 딱 한두 걸음만 빨리 뛰면 충분히 건널 수 있는데, 왜 그걸 안 할까. 그렇게 뛰는 게 창피한가? 위험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안다.
그건 단순히 창피해 서가 아니라, 정말 뛸 수가 없어서다. 숨이 차고, 무릎이 시큰거리고, 몸이 쉽게 반응하지 않는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까지 서둘러야 할 이유도 별로 없다. 간다고 해서 무언가 특별한 일이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급하다고 해서 인생이 흥미진진해지는 것도 아니다.
얼마 전, 우연히 운전하다가 아들이 횡단보도를 가볍게 뛰어가는 모습을 봤다.
신호등이 깜빡이자 고민도 없이 경쾌하게 뛰기 시작했는데, 그 발걸음이 어찌나 신나 보이던지 보는 내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고, 문득 부러워졌다. 저렇게 가볍게, 아무 생각 없이 ‘달릴 수 있는’ 마음과 몸이 말이다.
집에 온 아들에게 물었다.
“오늘 어디 다녀왔어?”
“친구랑 무인카페 가서 젤리랑 음료수 사 먹고, 학교 운동장에서 놀았어.”
언뜻 들으면 별일 아닌 하루처럼 들리지만, 아들은 하루 종일 즐거웠던 모양이다. 식탁에서 간식을 먹으면서 아들은 친구가 한 농담, 무인카페에서 뽑기에 실패한 이야기,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가볍게 기싸움한 얘기를 쉴 새 없이 이어갔다.
내가 “엄마가 차 타고 가다가 너 봤는데, 왜 그렇게 춤추듯이 뛰어서 건넜어?”라고 물었더니 아들은 고개를 갸웃하며 “몰라, 기억 안 나.”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인상 깊었다.
아들은 기분이 좋았고, 그 기분이 그냥 몸으로 흘러나온 것이었다. 걸음 하나에도 마음이 실린다는 것, 그게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내가 그랬는지도 잘 모르는 상황 말이다.
나도 그런 걸음으로 친구를 만나러 간 적이 있었을까? 아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러지 않는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 반갑고 설레도, 그 감정은 발끝까지 닿지 않는다. 기껏해야 조금 빠른 걸음일 뿐, 뛰지는 않는다. 왜일까? 기분은 있는데, 표현은 사라진 걸까?
생각해 보면, 아마도 ‘어른이니까’라는 말이 내 안에 단단히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몇 년 전이었다.
친한 친구가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와, 함께 동네에서 유명한 가맥집에 갔다. 창밖에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고, 따뜻한 안주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창밖으로 뜻밖의 광경이 펼쳐졌다. 중년의 남자 두 명이 눈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저 아저씨들 미쳤나? 아니 술 마셨나?’ 싶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이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한 내 자신을 반성했다.
‘왜 아이들이 눈싸움하면 귀엽고 자연스럽고, 어른들이 하면 이상한 걸까?’
‘왜 나도 모르게 그들을 향해 ‘미쳤다’고 생각한 걸까?’
우리는 아저씨들의 눈싸움을 보며 자연스럽게 ‘체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국 도달한 결론은 이랬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떤 감정은 눌러야 하고 어떤 행동은 참아야 하는 일의 반복이라는 것 아닐까? 기쁨도, 흥분도, 들뜸도 ‘절제’라는 이름 아래 다듬어져야만 비로소 ‘괜찮은 어른’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어른으로서 체면을 차려야 하는 순간이 분명히 있다. 교사인 내가 학교 근처에서 눈을 뭉쳐 친구에게 던지는 모습을 학부모가 본다면, 과연 나를 제대로 믿을 수 있을까?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신뢰와 이미지에 그다지 좋은 모습은 아닐 것이다.
얼마 전엔 딸과 함께 길을 걷다가, 상점에서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딸은 망설임 없이 따라 부르며 들썩였다. 그 순간 나도 같이 흥얼거리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다. 괜히 사람들이 ‘저 사람 왜 저래?’ 하고 수군거릴까 봐 참았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도 누군가가 그렇게 행동하면 똑같이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하면 괜찮고, 어른들이 하면 이상한 행동들이라는 그 경계는 어디서부터 만들어진 걸까? 왜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감정의 표현에도 나이를 매기게 되었을까?
이런 생각은 학교에서도 이어졌다. 현장체험학습을 가면, 아이들은 반마다 장기자랑을 준비한다.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마술을 선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해마다, 주로 젊은 선생님들이 그런 장기자랑에 참가한다.
예전엔 나도 장기자랑에 참가했다. 아이들과 함께 무대에서 춤을 추고, 웃긴 옷도 입고, 노래도 불렀다. 아이들이 깔깔대며 웃는 모습을 보면, 나도 덩달아 즐거워졌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무대에 서지 않는다. 나는 이제 맨 뒤 의자에 앉아 조용히 박수만 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갓 발령받은 남자 선생님이 선글라스를 끼고 트로트 음악에 맞춰 무대에 섰다. 아이들은 그야말로 열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또 한 번 멈칫했다. 무대 앞에서 아이들과 함께 소리 지르고 손뼉 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 선생님들이었고, 나처럼 조용히 뒤에 앉아 박수만 치는 사람들은 모두 중년의 교사들이었다.
그 순간, 마음이 찌릿했다.
‘나 왜 이러고 있지?’
‘왜 난 이 자리에만 앉아 있어야 하지?’
나는 망설임 없이 일어났다. 그리고 우리 반 아이들이 앉아 있는 맨 앞줄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이들 사이에 앉아, 무대 앞으로 다가오는 남자 선생님에게 손을 번쩍 들고 응원했다. 아이들과 함께 웃으며 나는 아주 오랜만에 체면이라는 단어를 뒤로 밀어두었다.
물론 체면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체면은 때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만들어주고, 불편한 상황을 피하게도 해 준다. 공적인 자리에서 지켜야 할 예의나, 타인을 배려하는 행동으로 작용할 때 체면은 사회적인 질서를 유지하는 데 분명 의미가 있다. 하지만 체면이 나 자신을 너무 오래, 너무 무겁게 눌러온다면 그건 지켜야 할 ‘가치’가 아니라, 언젠가는 넘어서야 할 ‘벽’ 일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중년의 교사이고, 두 아이의 엄마이다. 하지만 때때로 아이들처럼, 발걸음에 마음을 담고 싶다. 기쁜 날엔 조금 더 크게 웃고, 즐거운 날엔 조금 더 들떠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체면이라는 이름의 벽 앞에서도, 가볍게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