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꺼내지 않고 세탁해 버리면 없어지는 걸까
신은 공평하다. 나에게 적당한 키와 보통 수준의(?) 얼굴을 준 대신에 축구선수 못지않은 종아리 근육도 함께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하이힐을 잘 신지 않는다. 내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우람한 내 종아리 알을 바라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사실, 남들은 내 종아리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을 테지만, 그런 식으로 세상을 살면 인생이 너무 재미없지 않은가). 그런데 몇 년 전, 학교의 미국인 영어 선생님이 내 종아리를 보고 ‘아름답다’고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여자가 종아리에 근육이 있으면 섹시하다나 뭐라나. 나는 차마 한국에서는 종아리 근육을 없애는 수술이 있을 정도로 여성의 종아리 알은 인기가 없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칭찬으로 내 기분이 엄청 좋아졌다거나 내 종아리 알에 대해 자신감을 가졌다거나 하는 심경의 변화를 겪지는 못했는데, 별 다른 일이 없는 한 나는 한국에서 계속 살 것이고 여전히 탄탄한 종아리에 대해 컴플렉스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내 친구 명희는 아침마다 샤워할 때 빠지는 머리카락에 굉장히 민감해한다. 머리숱이 엄청나게 적기 때문이다. 내가 “야, 뭐 그런 거 가지고 고민하냐?”라고 말하자, 명희는 풀어헤친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움켜쥐더니 나를 보여주었다. 다 잡아도 내 새끼손가락 굵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친구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명희와 저녁을 먹던 어느 날이었다. 내 머리카락을 유심히 보던 친구는,
"너는 이 시간에도 머리카락 사이로 귀가 보이지는 않는구나."
라고 말했다.
"귀가 머리카락에, 뭐? 무슨 말이야?"
내가 묻자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보통 저녁시간쯤 되면 머리카락에 기름이 끼잖아. 나는 안 그래도 머리숱이 적은데 기름까지 끼면 얇고 갈라진 머리카락 사이로 귀가 슬쩍 보이거든. 근데 너의 엄청난 머리카락들은 아직도 푸석푸석하구나. 진짜 부럽다."
아직 미혼인 명희는 자신이 생각하는 결혼 상대자가 갖춰야 할 첫 번째 조건은 바로 풍성한 머리카락이라고 강조하면서 ,
"내 자식들에게 나의 컴플렉스를 물려주고 싶진 않아!"
라고 소리쳤다. 나는 '친구야, 내 자식들이 아빠가 아닌 엄마를 닮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니?'라고 말할까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않았다. 단지 나에게 부러움의 눈빛을 보내고 있는 그녀를 향해 우아하게 머리카락을 슬쩍 넘기면서,
"으, 머리 아파! 너 머리숱 많아서 가끔 두통 오는 거 모르지?"
라며 약을 올릴 뿐이다.
나의 언니는 키가 작다. 168센티미터인 나를 볼 때마다 종종 "나한테 5센티미터만 줄 것이지!"가 한때 그녀의 레퍼토리였다. 언니가 고등학생 때였던가. 집으로 언니 담임선생님이 전화를 했었다. 그 당시 언니가 다니는 학교는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다니는 곳이었는데 언니가 매일같이 학생이 신으면 안 되는 높은 구두에 바닥에 있는 온갖 먼지를 질질 끌고도 남을 정도로 긴 청바지를 입고 다니니 집에서 못하게 좀 해달라는 전화였다. 그때 엄마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선생님. 아이들 지도하느라 많이 힘드시지요? 사실 제 딸은 자기가 곧 키가 클 거라고 굳게 믿고 있어요. 그래서 청바지를 사고도 절대 자기 키에 맞게 길이 수선을 하지 않아요. 곧 클 건데 왜 자르냐고 대답하면서요. 그래서 긴 청바지를 입고 다니려면 어쩔 수 없이 굽이 높은 신발을 신고 다니는 것 같아요. 주변에선 다 말도 안 된다고 하지만, 제가 엄마인데 저라도 믿어 줘야죠. 하지만 학교에서는 못하도록 지도할게요."
현재 두 아이를 둔 엄마인 언니의 키는 여전히 작다. 하지만 180센티미터가 넘는 형부의 우월한 유전자를 이어받은 두 조카들은 또래들에 비해 큰 키를 자랑한다.
"네가 어릴 때 내 간식 많이 뺏어 먹어서 내 키 다 가져간 거야!"
언니가 여전히 독설을 내뱉을 때면 나는,
"자, 생각해 봐. 언니가 키가 크고 애들이 작은 게 좋아, 아님 언니가 작지만 애들이 큰 게 좋아? 당연히 후자가 좋겠지? 세상은 공평한데 언니는 진짜 복 받은 줄 알아."
라고 은근슬쩍 언니 기분을 추켜세워준다.
"흡. 그렇긴 하지."
라고 말하는 언니는 여전히 키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어서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하이힐을 고수하고 있다.
개그우먼 이영자가 일전에 한 프로그램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컴플렉스라는게 무섭거든요. 스스로에게 집중해서 물어봤으면 좋겠어요. 내 열등감이 무엇인지, 찾아내서 박살을 냈으면 좋겠어요. 열등감을 떨쳐내야 스스로 망가지지 않거든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에서 거북이는 왜 토끼와 경주한다고 했을까요? 거북이는 컴플렉스가 없었기 때문이죠. 그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간 것일 뿐, 느리다는 열등감이 없기 때문에 승패와 상관없이 거북이는 경기에 임할 수 있었을 거예요."
나는 아직도 밤마다 종아리 근육을 풀어주는 기계의 도움을 받고 있으며, 길을 가다가 군살 없이 늘씬한 종아리를 가진 여자를 볼 때마다 '아, 종아리 근육 퇴축술 수술이 얼마였더라?'라는 생각을 한다. 하나에 삼 만원이 넘는 비싼 압박 스타킹을 신으며 약간은 늘씬한 종아리를 가진 여자인 척도 해 보다가 집에 돌아오면 '이놈의 근육들, 어디 안 가나?' 하면서 종아리 마사지 기계에 다리를 다시 욱여넣는다.
나의 컴플렉스는 사라지지 않는다.
토끼와의 경주를 즐길 수 있었던 거북이와 나는 다르다는 얘기다. 하지만 종아리에 대한 열등감을 마치 음식점에서 받은 카드 영수증처럼 구겨서 호주머니에 집어넣을 수는 있다. 물론 집에 오면 슬며시 꺼내 보며 '이 정도면 뭐, 괜찮지'라고 생각했다가, 또 어떤 날에는 내가 아닌 남동생한테 쭉 뻗은 종아리가 몰빵 된 현실을 개탄하기도 한다.
뭐 어쩌겠는가.
나는 거북이가 아닌 인간인걸...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티베트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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