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키는 그때 야옹살롱에 있었다. 그 방은 고양이 그림을 전시하고 있는 갤러리였다. 피라미드 숨숨집의 회색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바람에 해피와 헤어지게 되면서 럭키는 아주 다른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그 회색문은 옆에 있는 코끼리 숨숨집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간 럭키는 또 하나의 회색문을 발견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문이라니!’ 럭키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머뭇거릴 틈도 없이 뭔가에 이끌리듯 럭키는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끝에 문이 있었는데 야옹살롱의 대형 전시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파란 물방울 무늬 수영복을 입은 삼색 고양이가 서핑 보드를 들고 서 있는 그림 옆에 전시 제목 ‘이상한 나라의 고양이 백화점(百畵店)’이 세로로 쓰여 있었다. 두드리지도 않았는데 문이 저절로 부드럽게 열렸다.
판타지로 가득찬 다양한 종류의 고양이 그림이 천장이 높은 방 네 면의 벽에 걸려 있었다. 여행을 하는 고양이 캐릭터를 재미있게 그린 그림들이었다. 여행지의 범위는 달나라에서 사막까지 아주 넓고도 다채로웠다. 산을 오르는 고양이, 서핑을 하는 고양이, 훌라밍고 춤을 추는 고양이, 달나라행 우주선을 탄 고양이, 스키를 타는 고양이, 사막의 고양이, 도서관의 고양이, 얼음집의 고양이, 들꽃이 만발한 꽃밭 한가운데 누워 있는 고양이… 화가의 상상 속 고양이 그림이 백 점이나 걸려 있었다. 럭키는 전혀 상상해보지 못한 이상한 나라의 고양이들 모습에 매료되어 한 점 한 점 찬찬히 구경을 했다.
액자 옆에는 사진 설명과 함께 그림 가격이 붙어 있었는데 럭키는 수를 세다 기겁을 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동그라미가 여섯 개에 1자면 백 만원이라고? 이 그림이 그렇게 비싸단 말이야?”
럭키는 눈을 비비고 다시 동그라미를 세어 보았다. 그래도 동그라미 수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 가격 옆에 빨간 동그라미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어떤 그림엔 붙어 있고 어떤 그림엔 붙어 있지 않은 걸 보니 붙어 있는 건 누군가 찜을 해 놓은 것이라 럭키는 추측했다.
많은 작품 중에서 가장 럭키의 시선을 끈 건 저녁 노을을 바라보는 흰 고양이의 뒷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골길 먼산 너머 노을이 불타는데 흰 고양이가 꼬리를 몸에 감은 채 얌전히 앉아 있었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그림의 분위기가 럭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그림은 주차장 집사의 컨테이너에 걸려 있던 작은 액자 속 고양이 사진을 생각나게 했다. 주차장 집사가 처음 키웠다는 고양이 스카이의 사진이었다. ‘스카이는 이름처럼 하늘나라로 갔어. 아마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을 거야.’ 주차장 집사는 액자를 볼 때마다 혼잣말로 그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이 그림도 이곳을 떠나면 누군가의 집 벽에 걸리는 거겠지?’ 다행히 그 그림에도 빨간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럭키는 괜히 안심이 되었다.
우주복을 입고 달나라 여행을 하는 호랑이무늬 고양이의 익살스럽고 귀여운 얼굴을 보고 럭키는 해피를 생각했다.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긴 장화를 신은 채 말을 타고 평원을 달리는 고양이 그림도 해피를 생각나게 했다. ‘해피는 지금 어디 있을까? 나를 찾고 있을 텐데…’ 럭키는 걱정을 하며 계속 해피 생각을 했다. 갤러리 출구를 찾으려 했으나 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셸위댄스, 안개속의 고양이, 고양이는 파도를 타고 등 그림의 제목도 보는 재미가 있었다. 도서관에 간 고양이를 보고 럭키는 칸슈 생각을 했다. 목에 빨간 나비넥타이를 한 턱시도 고양이가 장서로 둘러싸인 도서관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그림이었다. 럭키는 도서관에서 칸슈를 처음 만났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칸슈는 은행나무 옆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읽는 고양이라니!’ 그런 고양이를 처음 본 럭키가 다가가도 아랑곳하지 않고 칸슈는 책을 읽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칸슈에게 관심이 생긴 럭키가 말을 시켰고 그날 칸슈는 읽고 있던 어린 왕자 이야기를 럭키에게 들려주었다.
럭키는 그 이야기에 매료되었고 칸슈에게 반했다. 그날 이후 럭키는 거의 매일 칸슈에게 갔다. 칸슈는 럭키를 위해 많은 책을 읽어 주고 글자 읽는 법까지 가르쳐 주었다. 럭키는 칸슈와 함께 도서관에 들어가 책을 훔쳐보는 걸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럭키는 동화와 그림책을 아주 좋아했고 시와 소설도 사랑했다.
그림의 배경 전체를 채우고 있는 도서관의 책들은 아주 다채롭고 화려했다. 금박의 흐르는 글씨체로 제목을 써놓아 책들이 더 귀하고 신비스러워 보였다. 제목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고양이’인 걸 보니 인류 최초 도서관이었던 고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 대한 화가의 판타지를 표현한 것 같았다.
책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럭키가 금박 글씨에 살짝 코를 대보는 순간 책꽂이의 일부가 돌아가며 열렸다. 뜻밖에도 문이 거기 있었던 것이다. 깜짝 놀란 럭키가 뒤로 한 발 물러섰다. 큰 행운을 만난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 럭키는 그 작은 문으로 뛰어올라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이거야 원, 고행점이야말로 정말 이상한 나라가 확실해.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으니 말이야.’
럭키는 계단을 내려갔다. 안개가 자욱했다. 한참을 내려가도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어느 순간 부드러운 잔디 같은 감촉이 발 끝에 느껴졌을 때 럭키는 계단이 끝났다는 걸 감지했다. 다행히 안전하게 착륙했지만 그곳도 안개가 자욱했다.
“해피, 해피!”
럭키는 해피를 불러 보았지만 대답은 없었고 안개는 럭키의 말도 삼켜 버렸다. ‘장님이 된 것 같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안개에 매몰된 듯 숨이 턱 막혀왔다. ‘안개속을 헤매임은 참 이상하다.’ 럭키는 어느 안개가 자욱한 날 칸슈가 들려줬던 시를 떠올렸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뭐지? 그 다음은 뭐였지?’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더 이상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혹시 죽음이 이런 걸까? 어쩌면 나는 이미 죽은 걸까? 하지만 나는 이렇게 숨을 쉬고 있는 걸.’ 럭키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알 수 없는 죽음은 럭키에게 늘 미스터리였다. 누군가가 있다가 어느날 없어지는 것, 사라져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 럭키에게 죽음은 그런 것이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다 꿈은 아닐까? 어디서부터 시작된 꿈일까? 그 끝은 어디일까?’ 럭키는 밀려오는 생각의 파도를 넘으며 안개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멀리 희미한 글씨의 안내표지판이 보였다. 다가가서 보니 무지개 상점이라고 쓰여 있었고 벽이 무지개 빛깔로 칠해진 방이 나타났다. 뭘 파는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점의 문을 조심스레 열고 럭키는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과 달리 방 안은 벽이 온통 하얬다. 공중에는 다양한 색깔의 구름이 두둥실 떠 있어 독특한 미술품 전시장 같은 느낌을 주었다. 바닥에는 여러 종류의 함이 전시되어 있었다. 나무로 된 직사각형 함, 유리로 만든 투명한 함, 도자기 재질의 둥근 함 등 재질과 모양과 크기가 다양했다. 럭키는 그런 것들이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으나 직감적으로 무지개 다리를 건넌 후에 쓰는 요람일 거라고 알아챘다.
한쪽으로는 날개옷 코너가 있었다. 명주, 인견 등 여러 종류의 흰 천으로 만든 옷들이 옷걸이에 걸린 채 전시되어 있었다. ‘저런 옷을 어디다 쓰는 거지? 모두 나와 전혀 상관없는 것들이잖아.’ 럭키는 그러다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 ‘아니지. 나와 상관없진 않지. 내게 저런 것들이 필요없을 뿐이지.’ 피할 수 없는 어떤 어두운 그림자가 자신을 쫓아오고 있는 것 같아 럭키는 두렵고 외로웠다.
럭키는 나무로 된 네모난 함의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들어가 누워 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아늑했다. 길게 숨을 들이키자 은은한 나무향이 코를 타고 기도를 거쳐 빠르게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안개가 다시 주위에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갑자기 달콤한 잠이 쏟아졌다. ‘죽음도 이런 거라면 좋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럭키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주위는 녹색의 구름바다였다. 해피는 조각난 녹색 구름 위에 누워 있었다. 하늘은 어둡고 공기는 축축했다. 갑자기 빗방울이 후둑후둑 듣더니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해피의 구름요람이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앗, 이러다 떨어지고 말겠어.’ 해피는 구름요람을 꼭 붙들려 했고 그 순간 자신이 푹신한 이끼 같은 잎들로 뒤덮인 나무 꼭대기에 누워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곳은 키큰 나무들의 숲이었다. 얼마나 높은 나무인지 발 아래 세상이 아주 멀리 까마득해 보였다. 해피는 두려움을 느꼈고 그러자 나무는 더 흔들리며 춤을 추었다. 해피는 안간힘을 써봤지만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추락하기 시작했다. 길고 아득한 추락이었다.
“해피, 해피!”
누군가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집사가 나를 부르는 걸까?’ 비몽사몽간에도 해피의 마음은 복잡했다. 반가움과 죄책감이 뭉뚱그려진 미묘한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해피, 해피!"
이번에는 좀더 가까이서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집사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어쩌면 럭키의 소리 같기도 했다. 그 소리에 해피는 추락을 멈추고 꿈에서 깨어났다.
주위가 온통 초록 들판이었다.
‘여긴 어딜까? 좀전에 분명 포근한 녹색 침대에서 잠이 든 것 같은데… 아니, 그러다 녹색 구름요람에 누워 있었는데… 나무 꼭대기… 바람이 불었어… 녹색 침대가 푸른 초원으로 바뀌다니! 이제는 뭐가 꿈이고 뭐가 생시인지 정말 모르겠어.’
해피는 어리둥절해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리 검고 커다란 물체가 보였다. ‘저 검은 산 같은 건 뭘까? 여긴 대체 어딜까? 어쩌다 이런 곳으로 온 거지? 럭키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다시는 럭키를 볼 수 없는 걸까?’ 해피는 마음속으로 계속 럭키를 불렀다. 들판의 녹색풀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개박하향이 섞여 있는 듯했다.
럭키는 여전히 안개속을 헤매고 있었다. 서서히 안개가 걷히면서 멀리 거대한 검은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 보이는 저 검은 건 뭘까? 나무로 만든 작은 관에 누워 잠이 든 것 같은데… 맙소사! 어쩌면 내가 정말 죽은 건지도 모르겠다. 아직 죽은 게 아니라면, 저건 혹시 죽음이라는 괴물? 말로만 듣던 저승사자? 시커멓고 거대한 게 떡하니 버티고 있어!’ 럭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렇지만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도망칠 곳도 없었다. ‘어쩔 수 없지. 피할 수 없다면 부딪혀 보는 수밖에.’
럭키는 검은 물체를 향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안개가 걷히고 검은 물체는 더 뚜렷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정체는 오리무중이었다. ‘움직임이 없는 걸 보면 괴물이나 뭐 그런 건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아니야, 혹시 모르지. 웅크린 채 숨죽이고 있다가 다가가면 숨겨진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는 거대 괴물일지도.’
킹콩 같은 거대한 동물을 떠올리자 럭키는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검은 물체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고 작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검은 물체에 가까워질수록 럭키의 의구심은 커졌고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도 커졌다. 바닥의 풀잎에서 나는 상쾌한 향기가 움츠러드는 럭키의 마음을 그나마 좀 가볍게 해주었다.
해피는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눈을 크게 떠보았다. 검은 물체는 여전히 눈 앞에 있었다. ‘저 검은 건 대체 뭘까? 고행점에 왜 이런 곳이 있는 걸까?’ 해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조심 발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가까이 갈수록 검은 산의 정체는 더 수수께끼였다.
‘혹시 거대공룡이나 뭐 그런 건 아니겠지? 아니면 혹시 럭키가 말한 그 아이들을 잡아 먹는다는 마녀?’ 그런 생각을 하자 해피는 갑자기 소름이 돋고 으스스해졌다.
‘아니야. 이런 때일수록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정신줄을 놓으면 안 돼.’ 해피는 바짝 긴장을 하고 온몸의 신경세포를 총출동시키며 앞으로 나아갔다.
‘잠깐! 이건 무슨 소리지?’ 해피가 갑자기 멈춰섰다. 맞은 편에서 누군가 검은 산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건 아주 부드럽고 조심스런 발걸음 소리였다. ‘누구지? 혹시, 럭키?!’ 잠시 호흡을 멈춘 해피의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럭키도 그 순간 검은 산 너머 맞은 편에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느꼈다. ‘내가 아직 고행점에 있는 게 맞다면 저건 어쩌면 해피의 발걸음 소리가 아닐까?’ 럭키의 심장도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