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해피!”
“럭키! 럭키!”
두 고양이는 거의 동시에 서로를 불렀다. 그리고 극적으로 검은 산 너머에 있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힘껏 달려갔다.
“해피, 널 다시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럭키가 해피의 볼에 자신의 볼을 부벼대며 말했다.
“럭키, 어디 갔었어? 혼자 가버린 줄 알았잖아.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던 거야? 널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해피가 반가움과 원망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나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너무 어지러워서 뭔가에 이끌리듯 가다 보니 길을 잃었어. 안개 속을 헤매다 이곳으로 오게 된 거야. 널 다시 못 만날까봐 정말 걱정했어.”
“고행점에 오면 길을 잃지 않게 조심하라더니 그 말이 딱 맞았어. 나도 길을 잃고 이곳저곳을 헤매다녔거든. 가구점의 푹신한 소파에서 잠이 들었는데 깨어 보니 이런 곳이었어. 그런데 럭키, 저기 저 커다랗고 검은 건 대체 뭘까?”
해피가 초록 들판의 한가운데 섬처럼 우뚝 서 있는 거대한 검은 물체를 가리켰다.
“그러게, 나도 저걸 보고 이쪽으로 온 거야. 도대체 뭘까? 너무 긍금해.”
“뭔지 가까이 가보자.”
두 고양이는 잔뜩 경계를 하며 살금살금 검은 물체로 다가갔다.
“저게 뭘까?”
해피가 검은 물체 밑으로 삐져나와 있는 작고 동그란 금색 물체를 가리켰다.
“황금구두를 신은 괴물인가? 검은 옷을 입고 있잖아.”
럭키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뭐? 괴물?”
해피가 뒷걸음질치려 하자 럭키가 해피의 어깨를 두드렸다.
“농담이야, 해피! 저렇게 동그랗고 예쁜 발을 가진 괴물이 있을라고!”
그 순간 해피의 머릿속에 번쩍 하고 번개가 스쳐 지나갔다.
“럭키, 혹시 이 괴물이 노래가 말한 그 그랜드피아노 아닐까? 고행점에 엄청나게 큰 피아노가 있다고 했거든.”
“아, 맞다! 나도 들은 적이 있어 칸슈한테서… 고행점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피아노가 있다고 했어.”
럭키도 오래된 기억을 불러냈다.
“맞아, 럭키! 우리 집 피아노도 다리 끝에 동그란 발이 달려 있어. 이렇게 큰 건 아니지만. 근데 피아노 모양이 이렇게 이상하게 생기진 않았는데… 게다가 발이 세 개야. 우리 집 피아노는 발이 두 갠데…”
해피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럭키는 한쪽 구석을 향해 다가갔고 그곳에서 뭔가를 발견해내고는 크게 외쳤다.
“해피, 맞았어! 이게 피아노래. 근데 보통 피아노가 아니고 마음을 읽는 피아노래. 여기 그렇게 새겨져 있어.”
럭키가 가리키는 곳에 글씨가 있었다. 검은 벨벳 천에 금실로 수놓아진 글씨는 날아갈 듯 자유로운 필체였다.
“뭐? 마음을 읽는 피아노? 이게 그런 신기한 피아노라고?”
해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마음을 읽는다니!”
럭키가 도드라진 금색 글씨를 만지작거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게. 피아노는 치는 건데 말이야. 궁금하다. 뭘 어떻게 한다는 건지… 열어볼 수 없을까?”
해피의 호기심에 발동이 걸렸다.
“하지만 덮개가 씌워져 있어.”
럭키가 검은 벨벳 천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럼 열어 봐야지. 어서 빨리 열어 보자.”
해피가 재촉했다.
“아, 잠깐만. 여기 끈 같은 게 있어. 이걸 잡아당겨 볼까? 그럼 혹시 열릴지도 모르겠다.”
해피와 럭키는 함께 힘을 합쳐 금빛 수술이 달린 끈을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자 검은 벨벳 커버가 무대 커튼이 열리듯 양옆으로 주름을 만들며 당겨져 올라갔고 그랜드피아노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누군가 연주를 하다 잠시 덮개를 덮어 놓은 것처럼 피아노는 건반의 뚜껑이 열린 채였고 반사판 뚜껑도 위로 들어올려진 채 열려 있었다. 그래서 검은 덮개가 씌워진 모습이 그렇게 이상한 형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롱한 빛을 내는 검은 피아노의 위용과 자태는 두 고양이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우와! 정말 멋진 피아노다! 이렇게 큰 피아노가 다 있다니!”
해피가 감탄을 했다. 거대한 아름다움에 압도된 듯 럭키는 꼼짝않고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마음을 읽는 피아노라고?”
해피가 그렇게 말하며 피아노 건반 위에 살짝 손을 댔다. 그러자 놀랍게도 건반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럭키, 이것 봐! 피아노가 자동으로 움직여!”
해피가 흥분해서 외쳤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럭키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해피의 검은 눈동자가 점점 커졌고 귀는 쫑긋 세워졌다.
“소사 소사 맙소사! 믿을 수가 없어! 정말 마음을 읽는 피아노야! 내가 방금 이 음악을 생각했거든. 어떻게 내 생각을 알 수가 있는 거지?”
피아노를 본 순간 해피는 집사 생각이 났고 집사가 밤마다 들려주는 음악, 그날 밤 집을 떠나기 전에도 들었던 음악을 떠올렸다. 놀랍게도 피아노는 바로 그 음악을 자동으로 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참 아름답다. 무슨 곡인지…”
럭키가 귀를 쫑긋하고 물결치듯 움직이는 건반을 주시하며 말했다.
“‘달빛’이야. 드뷔시라는 작곡가가 만든 곡이래.”
“오늘 같은 밤에 딱 어울리는 음악이구나!”
럭키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우리 집사가 밤마다 내게 들려주는 자장가야. 오늘 밤도 내게 들려줬는데…”
집사의 얼굴과 목소리가 생각나 가슴이 먹먹해진 해피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너 집 생각이 나서 그러는구나! 집에 가고 싶은 거야?”
럭키가 해피의 마음을 눈치채고 물었다.
“아니야. 그런 건 아니야. 근데 음악이 왠지 슬프게 들리네. 안 되겠어. 그만 멈출래. 어떻게 해야 되지?”
해피가 건반에 손을 대자 해피의 마음을 읽은 피아노가 바로 연주를 멈췄다. 순식간에 정적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해피와 럭키는 한참 동안 할 말을 잃고 검은 침묵 앞에 서 있었다.
“럭키, 이번엔 네가 원하는 음악을 듣자.”
해피가 침묵을 깼다. 럭키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피아노 앞에 서서 건반 위에 살포시 손을 갖다 대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해피는 어떤 음악이 연주될지 너무 궁금해서 귀를 쫑긋 세우고 이리저리 돌리며 감상을 준비했다.
건반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느리고 단순한데 아름답고 슬픈 음악, 해피는 처음 들어보는 멜로디였다.
“우리 주차장 집사가 제일 좋아하던 노래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집사가 내게 가끔씩 불러줬어. 내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면 우리 집사도 덩실덩실 어깨를 들썩이곤 했는데…”
감상에 젖은 럭키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음악이 아름다운데 너무 슬픈 걸.”
해피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름다움 속에는 왜 항상 슬픔이 숨어 있을까! 해피, 다시 네가 원하는 음악을 듣자.”
럭키가 건반에 손을 대고 음악을 멈추게 했다. 해피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심스레 피아노 건반에 손을 댔고 또 하나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마음으로 불러냈다. 건반이 자동으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참 꿈 같은 노래다.”
럭키가 감상을 얘기했다.
“맞아. 제목이 트로이메라이, 꿈이라는 뜻이래. 이 곡도 우리 집사가 내게 자주 들려주는 음악…”
“그렇구나!”
“……”
“해피, 어쩌면 이 모든 게 다 꿈 같지 않아?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
럭키가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꿈이라면 오래오래 깨지 말았으면 좋겠다.”
해피가 움직이는 건반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했다.
“묘생은 꿈이라더니 꿈을 꾸는 게 우리의 일이지. 해피, 넌 어떤 꿈을 많이 꿔?”
럭키가 해피를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며 물었다.
“모르겠어. 이것저것 많이 꾸는데 잠에서 깨고 나면 다 잊어버려. 뭔가 생각이 날 듯 하다가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난 기억력이 안 좋은가봐.”
“나도 그래. 그 많은 꿈들을 저장하기에 우리 머리는 너무 작잖아. 사실 저장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지. 새로운 꿈들이 계속 생겨나니까.”
“맞아, 럭키. 그래서 내가 잠 자는 걸 좋아하는 거야.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으니까.”
해피의 말에 럭키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고양이는 나란히 앉아 음악에 귀 기울였다.
“해피, 넌 행복이 뭐라고 생각해? 고행점에서 그걸 찾은 것 같니?”
럭키가 갑작스레 질문을 했다. 당황한 해피가 잠시 머뭇거린 후 대답했다.
“글쎄, 아직 잘 모르겠어.”
해피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은 지금 이 순간 럭키와 함께 있는 게 너무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해피답지 않게 그 말을 하지 못했다.
“해피, 난 그게 지금인 것 같아. 내가 시간을 흘러가는 구름 같고 바람 같아. 내 영혼이 자유롭게 느껴져. 음악이 참 아름답다.”
럭키가 감흥에 겨운 듯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해피, 들어 봐. 아름답지 않아?’ 집사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이상하게도 해피의 기분은 더 가라앉았다.
“왠지 이 곡도 오늘은 슬프게 들려. 그만 들을래.”
해피는 음악을 멈추게 했다.
“다시 네 음악을 듣자.”
해피의 말에 럭키는 잠깐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피아노 건반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건반이 움직이지 않았고 당연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지? 럭키, 피아노가 왜 안 움직이지? 혹시 고장난 건가? 왜 아무 소리도 안 나는 걸까?”
해피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피아노로 뛰어올라가 건반을 눌러보았으나 여전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웬일인지 럭키는 당황하지도 않고 오히려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해피, 정말 놀라워! 내 마음을 정확하게 읽는 피아노야.”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해피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럭키를 바라보았다.
“내가 방금 침묵을 주문했거든.”
럭키가 나즈막이 속삭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침묵?”
“응. 음악도 좋지만 난 지금 여기가 조용해서 너무 좋아. 오랫동안 주차장 소음에 시달려서 그럴지도 몰라. 나는 늘 침묵의 순간을 고대해왔어. 아주 고요한 침묵… 지금이 딱 그런 순간 같아. 우리가 진정한 밤의 한 가운데 있는 것 같잖아.”
그 순간 그 공간은 진공 상태의 침묵으로 꽉 채워졌다. 해피도 럭키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피아노도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침묵 속에 두 고양이는 앉아 있었다.
“남은 건 침묵뿐… 어떤 왕자님의 마지막 말이 생각나네.”
럭키가 낮은 목소리로 침묵을 깼다.
“어린 왕자님이 그런 말도 했어?”
“아니, 어른 왕자님.”
럭키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까는 어린 왕자라고 하더니 어른 왕자님은 또 누구야?”
해피가 호기심을 갖고 물었다.
“이름은 햄릿, 덴마크라는 나라의 멋진 왕자야.”
“너는 아는 왕자님도 참 많구나!”
해피가 부러움과 존경심이 가득한 얼굴로 럭키를 바라보았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럭키가 연극하듯 대사를 읊었다.
“또 그 죽는다는 얘기…”
“내가 아니고 그 왕자님이 한 말이야.”
“그렇구나. 난 또…”
해피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해피. 잠이 든다는 것과 죽는다는 건 뭐가 다를까?”
“그거야 잠이 들면 깨어나지만 죽으면 깨어나지 못하고 계속 잠을 자는 거 아냐?”
“맞아. 그렇다면 죽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지 않을까? 영원히 잠을 잔다고 생각하면 말이야. 그럼 또 많은 꿈을 꿀 수 있을 테고. 기억을 못 하더라도 말이야.”
럭키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해피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죽는 건 안 돼. 우린 함께 모험을 해야 하니까.”
해피가 다짐을 했다.
“그래, 해피. 생은 햇빛이 비치는가 하면 곧 밤이라고 하더니 어느덧 깊은 밤중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아.”
럭키가 읊조리듯 말했다.
“너같이 유식한 친구를 진즉에 사귀었다면 나도 좀 똑똑한 고양이가 됐을 텐데 말이야.”
해피가 럭키를 우러러보며 말했다.
“하지만 해피, 너같이 용감한 고양이가 많진 않아. 너에겐 모험심과 도전의식이 있잖아. 그래서 우리가 이런 멋진 여행을 함께 하고 있는 거고.”
“난 좀 무모한 고양이니까.”
“마음을 읽는 피아노라니… 도대체 오늘 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말 마법 같은 밤이야.”
럭키가 말문이 막힌 듯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럭키, 만약에 말이야, 우리가 처음에 좁은 문을 선택하지 않고 파란 문으로 들어갔다면 우리의 모험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글쎄, 그랬다면 또 다른 멋진 여행을 했겠지.”
“맞아. 그랬겠지? 나도 모르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어.”
“가지 않은 길은 언제나 아쉬움으로 남기 마련이지.”
“아니 꼭 그렇다는 건 아니야. 아쉬울 게 뭐가 있어. 우리가 지금 이렇게 행복한데 말이야. 안 그래 럭키?”
“그래, 해피. 네 말이 맞아. 넌 참 똑똑한 고양이야.”
럭키가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 풀들은 우리가 좀 먹어도 되는 거 아닐까? 이렇게 넓디넓은 방이 다 초록 들판인데…”
해피가 킁킁 풀냄새를 맡으며 말했다.
“그러게, 이 정도면 조금 뜯어 먹어도 전혀 표시가 안 나겠는걸. 조금만 먹어볼까?”
럭키도 동의를 했다. 해피가 먼저 풀을 뜯어 먹자 럭키도 그 옆에서 풀을 뜯기 시작했다.
“이런 맛있는 풀은 처음 먹어봤어. 뭐랄까 좀 황홀한 맛이야.”
해피가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 맛은 언젠가… 아주 옛날에 어디선가 맛봤던 풀이랑 비슷한 것 같아.”
럭키가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주 옛날에 어디에서?”
“아주 옛날 페르시아 궁궐에서…”
“뭐? 페르시아 궁궐? 거기가 어딘데?”
“응. 아주 멀고도 먼 곳이야. 내 고향. 난 페르시아 고양이잖아. 털이 하얗고 북실북실한…”
“아, 그렇구나!”
해피가 럭키의 털을 유심히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원래는 눈처럼 하앴어. 공주로 불릴 때는.”
럭키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뭐? 공주?”
“응. 내 첫 집사는 나를 공주처럼 모셨어. 실제로 내 이름도 공주였고. ‘우리 공주님’이라고 부르며 뭐든 날 위해 다 해줬어. 맛있는 걸 주고 포근하게 재워주고 신나게 놀아줬어.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주고.”
추억에 젖은 럭키의 눈이 촉촉해졌다.
“그런데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내 말은, 그러니까 어쩌다 그런 곳에 살게 된 거냐고.”
해피가 주차장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나쁜 왕비가 나를 내쫓았어.”
“나쁜 왕비? 그게 누군데?”
“우리 집사가 결혼한 여자.”
“그런데 왜 너를 내쫓은 거야?”
“질투심 때문이지. 나를 내쫓지 않으면 자기가 나가겠다고 억지를 부렸어. 내가 자기 레이스드레스를 망가뜨리고 컴퓨터를 고장내고, 마지막에는 얼굴을 할퀴었다고 누명까지 씌우며 강짜를 부렸어. 결국 집사가 지고 말았지. 차가운 눈이 오는 날 나는 길바닥에 버려졌어.”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해피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뭔가 예사롭지 않던 럭키의 분위기에 그런 배경이 있었다 싶어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세상엔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많지만 얼음처럼 차가운 심장을 가진 사람들도 있어.”
“그렇긴 해. 나도 처음 살던 산동네 집을 나온 게 나를 싫어하는 집사 때문이었으니까.”
“뭐? 집을 나온 게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어?”
럭키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응. 나는 공주나 왕자와는 한참 거리가 먼 고양이야. 어느 산골 작은 집에서 태어났으니까. 어느 날 다른 동네에서 놀러온 할머니가 날 데려간 거야. 그렇게 가족과 헤어졌어. 그 할머니는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아들이 처음부터 날 싫어했어. 환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대접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어. 우리 모두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고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그런데 이유없이 날 싫어하는 거야. 애교를 부려도 소용없었어. 어떻게 나같이 귀여운 아기 고양이를 싫어할 수가 있냔 말이야. 난 그게 너무 부당하다고 생각했고 억울해서 참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어느 날 집을 나와 버렸지.”
“정말? 그랬구나! 넌 어려서부터 정말 남다른 아이였구나!”
“그냥 난 그렇게 타고 났나봐.”
해피가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히 말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집을 나오다니… 그래서 어디로 갔는데?”
럭키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산으로 가서 산고양이가 됐지.”
“산고양이? 산에서 어떻게 살았어? 무얼 먹고 살았어?”
“벌레를 잡아먹었지. 거미집도 먹고… 들쥐와 개구리, 참새와 메뚜기… 그리고 옹달샘 물도 먹고.”
해피가 기억을 더듬으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해피, 넌 정말 보기보다 더 대단한 고양이구나!”
럭키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난 그때부터 모험심이 좀 강했나봐. 춥고 배고팠지만 날 싫어하는 사람이 없으니 그래도 마음은 편했어. 그러다 어느날 달콤한 향기에 이끌려 과수원으로 갔고 그때부터 과수원집 고양이가 되었지.”
“과수원? 무슨 과수원?”
“사과 과수원. 아주 넓은 밭에 사과나무가 가득했어. 사과나무에 올라가 노래도 부르고 새도 쫓아다니고 정말 즐거웠던 시절이야. 예쁜 삼색이 고양이 삼순이와 연애도 했어.”
“그런 행복한 시절이 있었구나!”
“응, 하지만 오래가진 않았어. 어느 날 산적 같은 얼룩무늬 수컷이 나타나 나한테 결투를 신청했어. 삼순이한테 접근하지 말라면서.”
“그래서?”
“싸웠지.”
“싸워?”
“응, 엄청난 결투였어. 난 싸움이란 걸 처음 해봤는데 죽기살기로 덤볐어. 하지만 결국 지고 말았지. 다리에 피를 철철 흘리며 집에 갔더니 놀란 과수원 집사가 동물병원이 있는 도시의 친척집으로 날 보내 치료하게 했어. 그렇게 산골짜기를 떠나 도시로 오게 됐지. 그런데 치료가 끝나도 집사들이 나를 안 보내주더라고. 그렇게 눌러앉아 이 거대도시의 집고양이가 되었고 삼 년이 흐른 거야.”
해피는 뜻하지 않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면서 자신의 묘생이 결코 평범치 않았음을 느꼈다.
“그랬구나. 백 마리 고양이에 백 가지 사연이라더니…”
럭키가 해피를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해피는 왠지 머쓱해져서 럭키의 이야기로 다시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넌 그렇게 추운 날 길에 버려져서 길고양이가 된 거야?”
럭키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날의 일이 떠올라 가슴 한켠이 시린 듯 아파왔기 때문이다.
“그때 조금만 더 늦게 발견되었더라면 난 아마도 지금 이 세상에 없었을 거야. 몸이 얼고 심장이 차갑게 굳어지던 순간 누군가 나를 안았어. 그 따뜻했던 품을 지금도 기억해. 너무 포근했으니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어. 너무 감사해서…”
“그랬구나! 그 사람이 누구였어?”
“주차장 관리인 아저씨였어. ‘흰 고양이가 눈밭에 꼼짝않고 있으니 인형인 줄 알았네. 누가 이렇게 예쁜 고양이를 내다버렸을까? 불쌍도 하지. 하지만 넌 운이 좋았어. 오늘부터 네 이름은 럭키야, 알겠니? 이쁜 고양이.’ 아저씨는 목소리도 참 따뜻했어. 나를 꼭 안고 눈길을 한참을 걸어갔어. 안도감과 따스함에 잠이 들었었나봐. ‘여기가 앞으로 네 집이란다.’ 그 말에 눈을 떴지. 세상이 온통 하얬어. 눈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주차장에 있는 차들도 다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어. 아저씨는 관리실로 가서 난롯가에 담요를 깔고 내 요람을 만들어주더니 물그릇을 챙기고 맛있는 간식을 접시에 담아줬어. 정말 환대를 받았지. 그때부터 난 주차장 고양이가 된 거야. 거기서 십 년을 살았어.”
“십 년? 그렇게 오래? 네가 그렇게 나이가 많은 줄 몰랐어!”
해피가 새삼스럽게 럭키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말했다.
“난 꽤 오래 살았어. 주차장엔 이미 몇 마리 고양이가 있었어. 검정고양이 네로, 고등어무늬 고양이 고무, 샴고양이 샤미… 몇 년을 함께 하다 어느 날 바람처럼 하나둘씩 사라졌어. 그리곤 나 혼자 남아 또 한참을 살았어. 집사는 오랫동안 한결같이 나를 돌봐주었어. 집이 있어 비바람을 피할 수 있었고 세심한 집사 덕에 밥그릇과 물그릇은 늘 채워져 있었어. 밤이면 동네산책을 나설 수 있었고 꽃이 피면 온갖 향기에 취할 수도 있었지. 덕분에 많은 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어. 칸슈와의 도서관 데이트는 특별한 즐거움이었지. 나는 자유를 누리는 반집반길 생활이 아주 맘에 들었어. 난 제법 잘 살았어. 행복하게…”
회한에 젖은 듯 럭키의 낮은 목소리가 가녀리게 떨렸다.
“처음엔 네가 행복하단 말이 거짓말 같았는데 이제 진짜처럼 들리는걸.”
해피의 말에 럭키가 눈을 가늘게 뜨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난 정말 행복한 고양이야. 너를 만나 이렇게 황홀한 경험까지 하게 되었으니 말이야.”
럭키는 진심으로 해피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넌 도시의 고양이가 된 후 한 번도 밖에 나갈 생각을 안 해본 거야? 삼 년 만에 처음으로 집을 나왔다고 했잖아.”
럭키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 왜 오늘 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는지… 오늘 밤 밥그릇엔 맛있는 사료가 채워져 있고 요람은 푹신하고 아름다운 음악도 흐르는데 난 왠지 기분이 이상해졌어. 행복하지가 않은 것 같고 더 이상 내가 옛날의 나같지가 않았어. 그리고 문득 행복을 찾아 모험을 떠날 생각을 하게 된 거야. 집사가 고행점 자랑을 너무 해대서 궁금증이 폭발했는지도 몰라. 그래서 행복이 뭔지 한번 찾아나서기로 한 거지.”
해피는 어쩌면 자신도 럭키처럼 반집반길 생활이 어울리는 고양이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모험을 좋아하는 자신의 기질을 감춘 채 그동안 어떻게 좁은 집 안에서 집고양이로 살아올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놀라웠다.
“때가 된 거지.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니까.”
럭키가 공감의 표시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 맛있는 풀을 좀 더 먹고 싶어. 럭키, 우리 신나게 먹자. 어서…”
해피는 다시 풀을 뜯어먹기 시작했고 럭키도 열심히 풀을 뜯었다. 한참을 그렇게 정신없이 풀을 뜯고 난 후 두 고양이는 풀밭에 드러누웠다.
“럭키, 나 지금 너무 행복해.”
해피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알 수 없는 행복감에 휩싸여 구름 위에 둥둥 뜬 기분이었다.
“나도 지금 아주 행복해, 해피”
럭키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기분 좋은 행복의 파도에 온몸이 적셔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럭키, 이게 우리 행복의 끝은 아닐 거야. 우린 지금 고행점에 있고 우리의 모험은 여전히 진행 중이니까.”
해피의 말에 럭키가 행복한 갸르릉소리로 화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