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단편소설

by 수요일

단편소설 한 달

1.
밤이 어려운 건
마음이 어려워서,
마음 가는 대로 갈 수만 있다면
물처럼 살 텐데
내버려둔다 하고 실상은
물꼬를 막았던가보다.
막지 않으면 터진다는데
마음이 터지면
죽기라도 하나.
*
한 달이다. 살날이 한 달이 아니고 내 이름은 한 달이다. 성 한 이름 달.
달이라는 이름 참 좋다. 밤만 되면 뜨니까. 가끔은 낮에도 뜬다. 뜨지 않아도 거기에 있다. 보이지 않아도 안다. 거기 있는 거 다 안다.
이름이 달이라서 그럴까. 내 성격은 좀 웃긴다. 보름마다 변하는 웨어울프는 아니지만,
그런데,
한 달 정도 남았어요.
뭐가요?
한 달 씨 나머지 삶이 그렇게 되었네요.
그런 게 어딨어요?
암이, 손 쓸 수 없게 전이 됐어요. 왜 이제야 왔어요.
이렇게 팔팔한데 무슨 암이에요.
네, 아무튼 그냥 하고 싶은 걸 해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이에요.
하고 싶은 걸 하라고요?
하고 싶은 걸 하란다. 진짜 한 달, 남았나보다. 내 인생은 한 달짜리.

2.
하고싶은 걸 하라면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되나
마음 대로 안 되는 것들은
하고 싶어도 안 되는 것들은
늘 그대로다.
*
막상 하고 싶은 걸 하라니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다. 일상에서 특별히 뭔가를 하고 싶은 적이 없었는데 이제부터 생각해봐야 하나.
가끔 속이 뒤집어지게 아팠었다. 손톱달로 할퀴는 것처럼 뱃속에 든 모든 게 견딜 수 없게 아팠다. 약국 진통제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가는 고통.
그걸, 견디는 요령이 생겨서 참을 만 해진 게 문제였었나. 그래서 병이 커진 건가 싶다. 원래 참는 거 하나는 자신 있었는데. 손톱을 손바닥에 찔러넣고 주먹을 말아 쥐면 아픈 데가 나눠진다. 두 주먹을 말아 쥐고 그렇게 풍차처럼 막 돌리면 조금은 나아진다.
정 힘들게 아프면 이건 정말 어쩌다 쓰는 방법이지만 허벅지를 젓가락으로 찌르는 거다.
전에 한 두어 번 그래봤다. 지나가고 나면 허벅지가 아파서 문제지만 아무튼 통증을 이기는 방법의 끝은, 다른 고통으로 지금 고통 누르기.
챙겨주는 부모님도 없고 병원에 불쑥 갈 용기도 없고.
바다 가기
바다에서 해 뜨는 거 보기
자동차 타고 드라이브
휴게소 우동 먹어보기
데이트 해보기
내 남자랑 영화보기
미술관 가보기
아무 대책도 준비도 없이 무작정 한 달 동안 하고 싶은 걸 하라니... 그 의사 너무 무책임하다.
안 해본 건 많지만 그 중 하고 싶은 게 뭘까를 생각하며 밤을 보냈다. 새벽이 오도록 이것저것 적어봤지만, 결국은 안 된다. 혼자서는 무리 아니, 이 몸으로는 무리. 원래 꿈도 안 꾸었던 것들인데 괜히 써서 마음만 불편해졌다. 쫙쫙 찢어버리고 일단은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
잠자는 것.
아직 하루 밖에 안 지났으니 괜찮다. 잠들어도 괜찮다. 꿈이라도 괜찮다.

3.
꿈 꿀 수 없는 것들을 바라보는 건
상상이다.
꿈 꿀 수 있지만 이루기 어려운 건
그리움이다
*
아우우우 아윽 아이고 이거 뭐야...윽
자다가 고통이 시작되어 기절했다. 깨어보니 이불이 흥건하게 젖었다. 낮엔 그래도 병원에서 준 진통제를 먹으면 그나마 무뎌지는데 자다가 덤비면 속수무책이다. 왜 이렇게 아플까. 이제 시도 때도 없이 고통이 찾아온다.
밤이 지나고 창문에 분홍빛 아침이 들면서 서서히 고통이 잦아들었다. 이럴 때 자야 되는데 출근을 해야 한다.
난 공장에서 경리를 본다. 공장은 휠체어 탄 아저씨 아줌마 그리고 애들이 라인에 앉아 게임기 기판을 조립하는 곳이다.
작업은 어느 정도 완성된 기판에 간단하게 몇 가지 부품을 더하는 과정이다. 말하자면 정부 보조금을 받으려고 기판 만드는 회사가 재하청을 주는 공장이다.
고아원에서 다행히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덕에 선생님과 아빠가 추천하고 보증해줘서 취직했다. 그리고 나는 고아원에 월급의 20프로를 준다. 아, 강제로 아니다. 내가 주는 거.
아이들이 계란 묻힌 소시지 하나라도 더 먹길 바라며 주는 거다.
경리라서 돈을 만진다. 오늘도 이백 오십만 원이나 되는 돈을, 그것도 숫자만 오가는 인터넷 뱅킹이 아니라 캐시! 현찰로 세었다.
처음엔 큰돈을 만질 때마다 벌벌 떨었다. 혹시라도 숫자가 안 맞으면 그날로 내 인생은 끝이다. 그래서 머리가 아플 만큼 신경이 곤두섰는데 이젠 그때보다 많은 돈을 만져도 덤덤해졌다.
돈이 돈이 아니라 시퍼런 종잇장으로 보였으니까.
근데,
오늘은 돈이 돈으로 보였다. 하고 싶은 걸 해요, 라는 의사 대신 돈에 새겨진 이이가, 이황이, 신사임당이 하고 싶은 걸 하라고 이야기 했다.
하고 싶은 걸 해라. 한달도 안 남았는데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니. 한 달아.
한 달이란 이름보다 짧게 남은 인생이 유혹의 손길을 마구 내뻗었다.
한 달아, 이제부터 너는 달이다. 달.
아빠가 이름을 달이라고 지었다. 한 씨는 아빠의 성이다. 그래서 이름이 한 달. 다른 애는 이름이 해, 한해다. 또 다른 애는 별, 한 별이. 한 별이 보단 한 달이가 더 예쁘다고 생각했다.

4.
사람의 근원은 어쩌면, 슬픔인가보다.
웃긴 이야기가 사람을 만나면 슬프게 써진다.
*
퇴근 시간이 지나 집에 갈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통증이다.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직 공장에는 말하지 않았다. 말 하는 순간 관둬야 한다. 약을 찾아 먹었다.
아흑... 으
내 땀에 절은 블라우스를 보는 눈이 있었다. 그래 나 스물다섯이다. 탐나냐?
미스 한? 어디 아파? 웬 땀을,
공장 감독이다. 전에도 들이대기에 대충 넘어갔는데 번들거리는 눈은 땀이 아니라 젖어서 비치는 속옷에 머문다.
아뇨, 아까 점심을 급하게 먹었더니 체했나 봐요. 속이 답답해서.
그래? 내가 따줄까?
끙 소리도 내기 싫어서 담담한 목소리가 나온다. 잘했다, 한 달. 욕심 많은 개눈깔처럼 탁하게 무른 눈동자가 희번덕거리는 건 참 토 나온다. 어서 가기를 바라지만 꿈같은 이야기, 하늘이 돕는다면 누가 좀 나타났으면 좋겠다. 바로 지금.
퇴근 안 해요? 어? 달 씨 왜 그래? 어디 아파?
아아, 미스 한이 체했대요. 약이 있나 좀 찾아보려고.
젊은 사장이다. 평소에도 젊은 사람이 소외된 이웃을 돕고 어쩌고 아무튼 뉴스에 두어 번 나왔다. 알고 보면, 아무튼.
사장이 나타나자 개눈깔이 상비약을 뒤지는 척 했다. 상비약통은 내 책상 옆에 있다. 구부려 상비약통을 찾는 척 하지만 눈이 다리에 붙어있는 게 뻔히 보인다.
어이, 개눈깔! 나, 사실은 지금 무지하게 아프다고. 그러니까 좀 꺼져줄래?
머릿속으로 텔레파시를 마구 보냈다. 통했나. 사장이 개눈깔에게 직원들 퇴근 안 챙기냐고 했다. 직원들 중엔 퇴근을 챙겨줘야 하는 사람도 있다. 개눈깔이 물러갔다.
한 달 씨는 어서 들어가요, 퇴근시간 지났는데 왜 회사에서 아파, 어서 들어가서 쉬어야지.
이건 뭔 소리냐. 회사에선 아프면 안 되나? 하여간 약 덕분에 조금 둔해진 고통을 달래며 가방을 둘러메고 일어났다. 고통이 시작된 지 아직 얼마 안 된 예고편이라 견딜 만하다. 문제는 어디서 본판으로 아플 것이냐. 급히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작가의 이전글사랑적 폐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