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1그램

단편소설

by 수요일

단편소설 사랑 1그램

8

둘째 날,

영화를 보았다. 누군가와 영화를 본 건 처음이었다. 팝콘을 먹은 것도 처음, 누군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것도 처음. 그는 인형처럼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키가 비슷한 내가 머리를 기대기 편하게 해주었다. 러닝타임 내내. 침대에 누워 보는 것처럼 편안하고 아늑했다.

원래 그렇게 잘 해줘요?
뭘요?
뭐랄까, 마치 있는데 없는 것 같고, 없지만 꼭 있는 것 같아요. 사랑하면 다들 이렇게 하나요?
아,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하지만 아끼는 마음,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라면 대개는 같지 않을까요?
가이드 씨의 여자친구는 참 좋겠군요.

내가 그 말을 하자 그는 그냥 웃었다. 그 웃음은 그럼요, 같은 동의의 웃음보다는 그럴까요? 하는 반문의 웃음처럼 느껴져서 의아했지만 이내 그가 먹기 편하게 잘라준 작은 조각의 김치를 입에 넣으며 복잡한 생각은 접었다.

조조로 영화를 보고 점심을 먹고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은 처음 타본다. 난 그에게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같이 무엇인가를 경험하는 일이 무척 즐거워졌기 때문에 그가 뭘 하든 기꺼이 따라가는 마음이 생겼다. 지하철은 시청역에서 멈췄다. 그가 손을 잡고 나를 끌어 우리는 초록 라인의 지하철에서 내렸기 때문에.

맑았던 아침 하늘과 다르게 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지하철 상가의 어느 가게에서 비닐우산을 샀다. 삼천 원. 밖으로 나가 그의 어깨 한쪽을 듬뿍 적시며 걸어 덕수궁으로 들어갔다. 입장료 천 원.

비가 내리는 덕수궁인데도 사람이 제법 보인다. 시끌시끌한 중국인들, 발소리도 잘 안내는 일본인들, 동유럽의 무뚝뚝한 인상으로 가득한 유럽인들의 그룹이 가이드를 따라 오랜 시절을 묵묵히 서있는 고궁을 순례했다.

덕수궁 처음이에요.
다른 곳들은 가봤어요?
아, 하긴 다 처음이군요.
웃었네요. 우리 만나고 처음이에요.

그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내가 웃었을 거란 느낌은 눈가와 입가에 남아있었다. 웃었다, 라는 감정이 낯설어서 나도 모르게 다시 한 번 풋 하고 웃었다.

덕수궁을 나와 정동길을 걸으며 군것질거리를 사서 나눠먹었다. 거리는 웃자란 가로수 가지를 자르는 작업이 한참이라 비온 뒤의 상큼함에 풀냄새가 가득 배어 기억에 오래 간직될 생애의 한낮을 선물하고 있었다.

이 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면서요?
아, 그거 아는 군요. 임금의 승은을 못 받은 궁녀들의 한이 서려서 그렇단 옛이야기가 있어요. 근데 실제로는 가정법원 때문에 생긴 말이라고 알아요. 가정법원이 이쪽에 있을 때 이 길이 이혼하러 가는 길이라서. 하하하.
아,

그는 타고난 가이드인가보다. 가이드는 깊은 지식보단 엷고 넓게 여행자가 흥미를 가질 만한 것들에 능숙해야 할 테니. 하지만 사랑의 가이드를 하고 있는 지금은 가이드가 아니라 연인 같은 느낌이 새삼 들기 시작했다.

작가의 이전글사랑 1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