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장편소설
12. 우물
- 일종의… 상실감 같은 거예요.
- 상실…. 뭘 잃어버렸죠?
- 텅 빈 마음? 텅 빈 정신? 그래요. 정신. 우리는 정신을 잃은 누군가의 우물에 숨어든 악마입니다. 우물은 늘 배가 고파.
파란 눈의 남자가 유리벽 너머로 끝없이 놓인 캡슐을 바라보며 잔을 들었다. 옅은 아이보리 빛깔이 감도는 투명한 액체가 잔의 유리벽에 흐릿한 흔적을 만들며 흘러내렸다.
- 그거 알아요? 악마는 우물에 숨지 않아.
- 왜죠?
- 숨을 필요가 없거든. 악마는 우리와 같은 얼굴을 하고 우리와 같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우리와 같은 세상에 살고 우리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고 댄스를 즐기지.
잔을 빙빙 돌리던 남자가 한 모금 마셨다.
- 이 와인은 옛 지구의 소비뇽 블랑 품종으로 만들어진 무통 카데를 재현한 것인데 드라이하면서 산미에 바디감이 우물에 붓기엔 아까워요.
묵묵히 말을 듣던 여자는 순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 옛 지구의 모든 것들은 참 아름답군. 왜 옛 지구의 모습을 이곳에 심으려고 애를 쓸까요. 이제는 아무도 없는 다른 우주의 그림자 안에 기록으로만 녹아 사라진 기억일 뿐인걸. 이제 우물엔 와인이 말랐어. 모래뿐이지.
- 정신 때문이 아닐까요? 잃어버린 몸을 찾아 떠도는 유령 같은.
남자가 패널에서 수면 캡슐 어드레스를 찾아 메뉴를 열었다. 그리고 오픈을 눌러 잠시 바라보다가 그중 하나의 소거 탭을 눌렀다. 여자는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보았다. 남자는 경건하게 자세를 잡아 앉고는 유리벽 너머 하나의 캡슐이 레이어의 어드레스를 나와 라인을 타고 이동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하지 말아요.
여자가 담담한 목소리로 남자를 제지했다. 남자는 그런 여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캡슐이 이동하는 모습을 보았다. 콘트롤 룸은 원형으로 이루어진 돔이었다. 수많은 수면 캡슐들의 위치 어드레스가 방사상으로 중첩된 레이어가 돔의 각 부분을 빽빽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육신이었다. 그중 하나의 숫자가 빛을 선으로 바꾸며 이동하고 있었다.
- 누군가의 어머니와 아버지, 누군가의 아들딸이에요.
묵묵히 캡슐을 보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남자는 듣기만 할 뿐 여자 쪽으로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캡슐 어드레스 12132, 루미 오코너. 소거 프로세스를 진행합니다. 승인하시겠습니까?
적막한 콘트롤 데크에 감정 없는 기계음이 울렸다.
- 승인한다.
캡슐 어드레스 12132, 루미 오코너의 소거를 진행합니다.
삐이…
캡슐에 이어진 튜브가 하나씩 분리되고 캡슐 바닥의 공간이 열리며 안에 채워졌던 액체가 분출되었다. 텅 빈 캡슐에서 백 년의 시간을 숨 쉬던 육신에서 생명 징후가 사라졌다.
텅!
데크를 울리는 소리와 함께 캡슐이 완전히 열리고 정신이 사라진 육체가 어두운 심연으로 추락해갔다.
소거 프로세스를 완료합니다.
그 순간 먼 우주의 어느 곳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별 지우개 함선 하나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빛으로 변하여 새카만 공간을 하얗게 밝힌 함선은 어둠 속으로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텅 빈 캡슐이 제 위치로 돌아갔다. 여자는 남자의 표정이 궁금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드레스 12133 다종 말레나 캡슐 소거 프로세스를 완료합니다.
어드레스 12134 마사 테일러 캡슐 소거 프로세스를 완료합니다.
어드레스 12135 스미스 워커 캡슐 소거 프로세스를…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센터 시스템의 프로세스 알림이 마침내 끝났다. 콘트롤 데크에 적막이 돌아오고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숫자를 세고 있었다. 97, 98, 99… 백 년을 유지해온(살았던이라고 하려니 저들은 과연 살아있었던 걸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흔아홉 명의 시간이 완전히 멈춘 것이다.
- 신연방 역사 최초의 제노사이드를 기록했군요. 당신은 히틀러 같은 학살자로 후세에 기억될 겁니다.
남자가 입을 열려다가 문득 멈추고 엘리를 보았다.
- 차가운 우주를 떠돌다가 어느 별의 인력에 끌려 들어가 이름 모를 별에 추락하여 무덤이 어딘지도 모르고 타버리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 그래도 생명이에요.
- 맞아요. 아주 소중한.
- 그런데 무슨 권리로 그 숨을 끊어요?
- 저들은 인스톨을 결정한 후부터는 스스로도 삶이란 것에 미련을 버렸을 겁니다.
- 관리자님이 결정할 문제는 아니지 않아요? 저들 중 얼마나 돌아오지 못할 거로 생각하고 수면체가 됐을까요.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마다 상황은 다 다를 거라고요.
남자는 관리자였다.
- 생각해봐요. 돌아와도 아는 사람은 모두 사라지고 자신만 오롯이 세상에 남아있다면.
의자에 묶여 담담히 그의 말을 들으며 엘리는 지금 자신에게 닥친 위기보다 휴머노이드가 되어 백 년의 시간을 보내고 깨어나 센터를 나섰을 때 어디로 가야 할까에 집중했다.
세 개의 인공 달이 떠 있는 밤. 신연방의 철저한 계획과 관리로 아직도 쏟아질 듯 깨끗한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가로수가 늘어선 길을 천천히 걸었다. 가슴 벅찬 감동이 느껴졌다. 별 지우개 조종사와 함께한 지난 100년은 너무나도 지루하고 너무나도 먼 여행이었다. 아 맞다!
- 맞아. 조종사! 조종사가 있어요. 휴머노이드들은 혼자가 아니었어. 백 년의 시간을 함께한 우정 혹은 사랑, 혹은 전우애든 그들에게는 연대가 있어요. 조종사는 돌아오잖아요.
관리자가 엘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 아니요. 돌아올 수 없어요. 프로젝트는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았어요.
- 무슨 말이에요? 불법으로 진행된 거라고요?
관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 별 지우개 프로젝트를 아는 사람은 프로젝트를 계획한 사람, 신연방에서 돈을 받은 관리, 그리고 돈을 댄 기업, 휴머노이드와 조종사, 그리고 나와 당신.
- 아…
순간 엘리의 등줄기로 소름이 지나갔다. 하지만 표정을 최대한 지우고 말했다.
- 그들은… 돌아와서는 안 되는 거군요.
관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 왜 나를 강제 수면했죠? 어차피 당신은 나도 죽…
관리자가 엘리를 보았다.
- 당신은 죽지 않습니다.
- 무슨 말이죠?
- 오늘이 지나면 나는 당신을 다시 수면 캡슐에 넣을 겁니다.
관리자가 자신의 곁에 있는 소울 드라이브를 들어 보였다. 그 드라이브는 휴머노이드를 인스톨하는 장치였다.
- 나더러 거기 들어가라고요?
관리자는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 지금 별 지우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인원 중 휴머노이드 아흔아홉 명은 센터에서 소거되었고 조종사는 함선의 자폭 장치가 가동되어 각자의 위치에서 소멸했을 겁니다.
- 아…
엘리는 한숨이 터지는 걸 막지 못하고 머리끝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이것은 두려움을 넘은 공포였다.
- 센터의 캡슐에서 수면 중이던 아흔아홉 명의 휴머노이드와 어딘지 모를 먼 우주에서, 혼자 무슨 임무인지도 모를 임무를 수행하던 조종사 아흔아홉 명. 모두 198명이 한순간에 사라졌군요.
엘리가 숫자를 나열했다. 그리고
- 아! 나머지 두 명… 두 명은 어디 있죠?
관리자가 한숨을 내쉬고 유리벽 너머 어딘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관리자를 보던 엘리가 곰곰이 생각을 정리했다. 두 명이 누구지? 맞아. 휴머노이드였어. 처음 인스톨에 성공한 이룬.
- 이룬?
관리자가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 함선은 자폭했다면서요. 이룬은 돌아와 있나요? 이룬 말고도 먼저 인스톨 된 사람도 있었어. 그 사람은요?
- 잘했어요. 엘리. 당신은 역시 내 생각대로군요.
- 생각대로?
- 당신의 두뇌는 특이점이 있어요. 기억이 쌓이는 게 아니라 나열되는 두뇌입니다.
- 아… 내가 그랬군요.
- 맞아요. 기록하고 재생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췄어요.
- 뭐, 좋아요. 그렇다 치고.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 건가요?
- 조종사 중 한 사람은 살아있을지도 몰라요.
- 누구죠? 그 함선 조종사?
- 그래요. 그의 생사가 아직 분명하지 않고 그래서 두 명의 휴머노이드. 총 세 명이 생존하고 있어요.
- 맞아. 먼저 인스톨했다는 휴머노이드가 주린인가 그랬어요. 그리고 이룬, 기주. 백 번째 별 지우개.
- 정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