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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IGE Jun 07. 2017

한강 [채식주의자]

한국소설; 맨부커 인터내셔널 수상작

《소년이 온다》를 읽으며 그녀의 담담한 문체에 적잖이 놀랐고 그래서 유난히 기억에 남았다. 한강이라는 작가를 기억하고 있었을 때, 마침 친구의 추천으로 2005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한강의 《몽고반점》을 읽었다.


2015년 4월경에 수상작을 읽었는데 그때의 나는, 단편으로 쓰여 있는 《몽고반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욕망, 예술, 섹스, 식물성과 동물성, 도덕적 행위 비도덕적 행위를 분류하느라 이 글들의 핵심을 읽을 수 없었고 그녀의 글을 단순히 문학으로만 보려 했기에 더더욱 접근할 수 없었다. 짧다면 짧은 2년여 사이에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아니면, 의문만 남았던 《몽고반점》 단편의 매듭이 총 2편의 또 다른 《채식주의자》, 《나무불꽃》을 통해 맺어졌기 때문일까? 




이번에 읽었던 《채식주의자》는 사뭇 다르게 내게 다가왔다. 채식주의자 주인공인 영혜 내면에 갖고 있던 상처가 채식주의자의 형태로 폭발한 순간, 그저 꿈은 하나의 계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비도덕적인 행위로 보느라 다른 글들은 제대로 읽을 수 없었던 《몽고반점》 또한 그녀가 받아왔던 폭력적인 관계들을 통해 폭발한 또 하나의 형태라고 읽혀지니 2015년에 보지 찾지 못했던 퍼즐을 하나 끼워 맞춘 느낌이 들었다.


과잉소비의 쾌락을 위해서 수많은 생명체를 공장 구조에서 ‘생산’하는 것을 윤리적으로 비판하는 행위가 오히려 비정상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시대에 말이다. 팽창의 시대에 축소를 택한 그녀에게 남은 일은 시대착오의 의미 그대로, 살아 있는 화석이 되는 것뿐이다. (_232)



《몽고반점》을 읽으며 처제와 형부가 행한 행위는 비도덕적인 행위로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고 정신병원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아마 독자 대부분은 당연하다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지금껏 영혜가 받았던 폭력은 가족이기 때문에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부분인가? 나는 의문이 들었다. 채식주의자를 고집한 영혜를 몰아세우고 따귀를 때리고 억지로 고기를 먹게 만들려는 가족들의 행동은 도덕적인 것일까? 비도덕과 도덕의 차이, 식물성과 동물성, 욕망, 예술, 섹스 처음에는 이해가 안됐던 모든 것들이 결국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의미가 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려 하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렵다만 연달아 늘어놓고 책을 덮었던 것은 아닌지.




그 순간 그녀는 뜻밖의 고통을 느꼈다. 살아야 할 시간이 다시 기한 없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 한달 동안 염려했던 큰병의 가능성은 오히려 사소한 번민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돌아오는 길, 다시 왕십리역의 승강장에 섰을 때 그녀의 다리가 허전거린 것은 방금 시술한 자리의 통증 때문만은 아니었다. (_197)


《채식주의자》를 읽는 내내 밝지 않았다. 그런데 오히려 나는 위로 받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모두 이렇게 휘청거리고, 나를 속이며 살아가고 있구나. 자신에게 가장 솔직한 영혜는 결국 자신을 몰아세울 수밖에 없고,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인혜를 보면서 나 역시, 폭력적인 형태로 내 자신을 위로하기 바빴다. 빠르게 읽어 내려간 책이지만, 읽어낸 시간만큼 간단하고 가벼운 책은 아니었다.




그녀가 일상을 언제든 포기하고 광기 혹은 죽음에 투신해버릴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읽기를 중단하고 이 공간의 바깥으로 나가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매혹적인 타인 앞에서 우리는 늘 붙박이고 얼어붙는다. 그러니 우리가 이 공간의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녀는 타인들의 열정이 빚어낸 끔찍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보도록 지명되어, 최후의 독자이자 ‘작가’로서 타인들을 끌어안았다. (해설 | 열정은 수난이다, 허윤진_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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