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3] 낡은 구두와 K의 출근길 시련

비 오는 날, 나는 걸어 다니는 늪이다

by 유블리안
[System Login: ‘낡은 구두’에 접속했습니다.]
[Object: 갈색 소가죽 정장 구두 (Size: 270mm)]
[Condition: 폐급 (밑창 마모 심각, 방수 기능 상실)]


의식이 돌아온 곳은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다.

쿰쿰하고 시큼한 냄새가 먼저 느껴졌다. 오래된 가죽 냄새, 덜 마른 발 냄새, 전날의 술기운이 남긴 텁텁함까지.
그 모든 것이 내 폐부, 아니 정확히는 안창 깊숙이 눌러앉아 있었다.

나는 좁고 어두운 상자 안에 갇혀 있었다.
자취방 신발장.

나는 K 대리의 오른쪽 구두로 로그人된 K다.

내 옆에는 회색 러닝화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K가 주말에나, 그것도 마음먹으면 신을까 말까 한 녀석이다.
표면은 여전히 뽀송했고, 고무 밑창엔 먼지조차 적었다.

나는 어제 회식의 여파로 온몸이 욱신거렸고,
녀석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했다.

심통이 나서 먼저 말을 걸었다.

“야, 좋겠다. 오늘도 방콕이지?
나처럼 하루 종일 굴러다닐 일도 없고.”

러닝화가 바르르 떨리더니 바로 받아쳤다.

“배부른 소리 하지 마.
쉬는 게 좋은 줄 알아? K가 운동을 안 하니까
내가 여기서 세 달째 썩고 있는 거야.
나 밑창 고무 다 삭겠다.”

그제야 말문이 막혔다.

맞다.
K는 입사 후 5년 동안,
운동은커녕 산책할 여유조차 없었다.

일하는 구두는 닳아빠지고,
신지 않는 운동화는 썩어간다.

신발장 안이든 밖이든,
여긴 다 같은 지옥이었다.

끼익—

그때 문이 열리며 빛이 쏟아졌다.
거인의 발이 다가왔다.

엄지 쪽이 해질 대로 해진 회색 양말.
K의 발이었다.

“아, 미치겠네. 늦었다.”

망설임도 없이 그의 손이 나를 집어 들었다.
러닝화가 ‘나도 데려가’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K는 듣지 못했다. 아니, 들을 여유가 없었다.

구두주걱은 또 없었다.
아마도 어딘가 쓰레기 더미 속에 처박혀 있겠지.

K는 내 뒤통수, 힐컵을 무자비하게 짓눌러 발을 쑤셔 넣었다.

‘야, 구겨진다고.
손가락이라도 넣어서 신든가.’

내 비명은
그에게 그저 가죽이 비틀리는 '찌걱거리는'소리로만 들렸을 것이다.

아침부터 그의 발은 퉁퉁 부어 있었다.
입사할 때 샀던 270mm 정사이즈.
5년 사이 살이 찐 건지, 부기가 빠지지 않는 건지
내 안은 터질 듯 꽉 찼다.

K는 현관 바닥에 내 앞코를 탁, 탁 두드려
억지로 자리를 잡더니 그대로 뛰쳐나갔다.

“헉, 헉—”

현관을 나서자마자 그는 달렸다.
아스팔트가 내 밑창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쿵. 쿵. 쿵.

30대 남자의 체중이 고스란히 내려앉았다.

[충격 감지: 체중 78kg + 노트북 가방 3kg = 합 81kg]

K의 걸음걸이는 늘 이렇다.
마음이 급해 우당탕탕.
그래서 나는 항상 바깥쪽 뒷굽만 먼저 닳는다.

뼈가 갈리는 느낌이다.

‘K야, 살 좀 빼자.
야식도 좀 끊고.’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어젯밤 비가 왔는지 보도블록은 젖어 있었다.
신호가 바뀌려는 걸 본 K가 급하게 물웅덩이를 밟았다.

첨벙.

“아, 씨… 차가워.”

재봉선 틈으로 흙탕물이 스며들었다.
밑창이 닳고 닳아
방수 기능 같은 건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눅눅하던 내 안쪽 살이
차가운 구정물을 그대로 빨아들였다.

양말이 젖어 들어가는
그 찝찝하고 축축한 감각.

K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지각하면 팀장에게 깨질 테니까.

그는 젖은 발로 다시 달렸다.

그때부터였다.
내 몸 안에서 기괴한 소리가 나기 시작한 건.

꾹.
체중이 실리자—

“피이익—!”

물과 공기가 동시에 빠져나가는 소리.
방귀 같기도 하고,
젖은 걸레를 쥐어짜는 소리 같기도 한
민망한 파열음.

K가 흠칫 멈췄다.
그리고 다시 발을 뗐다.

철퍽.

“찌이익—”

이번엔 물이 다시 빨려 들어왔다.

완벽했다.
나는 이제 구두가 아니라 악기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피이익, 츅, 찌그럭.

K는 소리를 죽이려는지
걸음을 어정쩡하게 바꾸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세는 더 이상해졌고,
소리는 더 커졌다.

“아… 씨. 쪽팔리게.”

주변 시선이 느껴졌다.
비 오는 날 젖은 신발은 흔하지만,
이렇게 요란한 물피리 소리는
관리 안 된 낡은 구두의 증거니까.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미 나는 물을 잔뜩 머금은
걸어 다니는 늪이었다.

지옥철 2호선 승강장.
사람으로 가득 찼다.
K는 구석에 몸을 밀어 넣었다.

문제는 냄새였다.

5년 묵은 가죽 냄새,
빗물의 비린내,
K의 땀 냄새가 뒤섞여
천천히 숙성되기 시작했다.

내 앞에는 명품 구두가 있었다.
표면에 빗물이 맺혀 있었지만
스며들지는 않았다.
방울은 가죽 위를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마치
“너 같은 비 따위가 감히?”
라고 말하는 것처럼.

반면 나는
닿는 족족 빨아들이고 있었다.
가죽은 시커멓게 변색되고
K의 발 모양대로 흉하게 늘어졌다.

옆에는 흰색 나이키 운동화가 있었다.
흙탕물이 조금 튀어 있었지만
그조차 젊음의 패턴처럼 보였다.
탄탄한 고무 밑창과 쿠션이
주인의 발을 말끔히 지켜주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 사이에서 나는
무거워진 채 찌걱거리며 서 있었다.

지하철 유리창 아래
스테인리스 판에 내 모습이 비쳤다.

참 못생겼다.
앞코는 벌어져 억지웃음을 짓고,
온몸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K의 축 처진 어깨와
내 젖은 가죽은 묘하게 닮아 있었다.

우리는 둘 다
세상의 풍파를 온몸으로 흡수하며
말없이 젖어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내립니다!”

신도림역.
환승이다.

K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갔다.
그 과정에서
나는 캐리어 바퀴에 복숭아뼈를 얻어맞고,
누군가의 킬힐에 뒤꿈치를 찍혔다.

찍.

가죽이 긁혀 나가는 소리.
아마 지워지지 않을 흉터가 남을 것이다.

하지만 K는 보지 못했다.
볼 여유도 없었다.

그는 개찰구를 향해 다시 달렸다.
내 밑창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올랐다.

‘천천히 좀 가자, K야.
나, 다 닳았다고.’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멈추면
그의 하루도 멈춘다는 걸.
내가 닳아 없어지는 만큼
그가 오늘 하루치 밥값을 번다는 걸.

그래서 나는
아무 말 없이
내 굽을 더 깎아가며
아스팔트를 밀어냈다.

이건 선택이 아니다.
다른 방법이 없을 뿐이다.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