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시간이다. 그날따라 왠지 모르게 잔잔한 발라드가 듣고 싶어졌다. 발라드의 감성에 취해 음악을 듣던 중귀에 꽂히는 익숙한 멜로디.
한동안 꽤 많이 들었었던 노래였다. 언제부턴가 듣지 않게 되었던 노래. 어떤 사연이 있다거나 이유는 딱히 없지만 자연스럽게 듣지 않게 된 노래. 오랜만에 듣는 거였지만 여전히 멜로디와 그에 어우러지는 가사, 그리고 이야기하듯 가사를 읊는 아련한 목소리가 참 좋았다.
멜로디를 흥얼거리는데 갑자기 어떤 얼굴이 어렴풋이 내 머릿속을 관통했다. 정말 갑자기.
어떠한 단어도 그 순간을 대신할 수 없다.눈 깜짝할 새도 없이 그 멜로디는 꽤 깊숙하게 박혀있던 과거로 날 끌어당겼다.
2017년, 23살.
연애도 사랑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나이.
나 자신에 대해서도, 세상물정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거의 없던 시절. 좋게 말하면 순수했던, 나쁘게 말하면 철이 없던 시절이다.그 당시 만났던 사람이 있었다.
그와의 마지막이 생각났다.
“우리 헤어져.”
“그 말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당연하지. 내가 후회를 왜 해?”
“알았어.”
그렇게 전화를 끊었고 그건 그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이번에도 당연히 날 붙잡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정말로 끝이었다.전화를 기다리고 문자를 기다렸다. 새벽까지 연락을 기다리다 잠이 들었고, 몇 시간 후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또다시 핸드폰을 확인했다. 눈치 없이 오는 광고 문자가 야속하기만 했다.
그렇게 일주일, 한 달, 세 달... 그제야 깨달았다. ‘진짜로 헤어졌구나 우리.’ 그렇게 허무하게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했고,
후회를 왜 하냐며 화를 냈던 나를 후회했다.
만나는 동안 헤어지자는 말을 남발하며 그의 마음을 계속해서 의심했고,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나에게 맞추려는 최악의 연애를 했다.그럴 때마다 그는 자존심을 굽히고 날 붙잡았고 나 또한 진심으로 헤어지자고 한 것이 아니었기에 못 이기는 척 붙잡혔다. 싸우고 이별하고 재회를 반복하던 건강하지 못한 연애의 굴레에 있던 23살.
헤어지자고 할 때마다 어쩔 줄 몰라하는 그의 표정이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노래는 끝이 났지만힘없이 과거로 끌려들어 가 버린 나는 그와 내가 담겨 있는 노래들을 더 듣고 싶어졌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내 손과 눈은 자꾸만 그와의 추억들을 찾고 있었다.
그와이별 후에도 2번의 연애를 했다. 심지어 그와의 연애가 첫 연애도 아니었다.'왜 그 사람이 생각나는 거지?'
전 애인도 아니고 전 전 애인도 아니다.
무려전 전 전 애인이었다.
마치 그가 옆에 있는 것만 같았다.
“오빠”라고 부르면 다정히 대답해 줄 것만 같았다.
자기 옆에 있어줘서 고맙다고 말해줄 것만 같았다.
갑자기 내 눈에서는 해일이 밀려오듯파도가 쏟아져 내렸다.
나보다 2살이 많았었기에 당시에는 훨씬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사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5살이나 어린 25살이었다. 나이가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철없는나를 자상하게 이끌어 주고 치열하게 자신의 세상을 살아가던 그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와 이별 후 후회하고 또 후회했지만, 그는 나에게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가전혀 없을 것 같아 이별후 한동안은 가슴이 아팠었다. 아주 많이.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있던 23살의 어린 마음이라 먼저 연락을 할 생각도 못했었고, 연락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받아줬을 지도 의문이다.
그 사실이 내 가슴속을 또다시 후벼 팠다. 주변 사람들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연애에 있어 최악인 나였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내 옆을 지켜주던 사람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며 점차 잊어가고 있었다.이제는 생사의 여부조차 알지 못하는 사이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그런데 이별 후 7년이 지난 지금, 정말 신기할 정도로 나는 그와의 추억이 반짝이던 23살로 돌아가버렸다.가끔 그와 갔던 장소에 가거나 그와 관련된 것들을 볼 때 생각이 잠깐 난 적은있었으나이렇게까지 과거를 생생하게 떠올렸던 적은 이별 직후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정말 신기하고 무서운 경험이었다.
그와의 연애 이후 많은 걸 깨닫고 변했기때문일까? 그를 정말 많이 사랑했었기 때문일까?
그렇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다. 다시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그의 SNS를 찾아보았는데 그는 새로운 연인과 행복해 보였다.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나라는 존재는 그냥 스쳐 지나간전애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주일 이상을 그렇게 과거의 늪에서 허둥거리다 겨우 현실로 빠져나왔지만그 이후로도 가끔 그가 생각이 난다.
그 시절 음악을 들으면 더욱 그렇다. 음악의 힘이 대단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음악은 마치 타임머신처럼 날 과거로 끌어당긴다. 그가 생각난다고 해서다시 만나고 싶다거나 미련이 남은 것이 아니다.지나간 추억을 회상하는 것처럼 가끔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전 애인뿐만 아니라 한 때는 친했지만 지금은 생사의 여부조차 알 수 없는 그런 인연들도마찬가지다. 악연이라해도 완전히 잊을 수는 없다.
내 삶의 한 부분을 차지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좋든 싫든 나의 기억 한 구석에는 당연하게존재한다.
남자의 첫사랑 무덤까지 간다고/ 사랑의 기준은 언제나 너였어
FT아일랜드의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
남자의 첫사랑이 무덤까지 간다는 말은 흔히 쓰이는 말이다. 내가 남자가 아니라서 그 의미와 사실에 대해서는 확실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미련 가득한 채로 무덤까지 가는 게 아니라 문득 그 사람이 떠오르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하고 있는 중에도 충분히 첫사랑이 생각날 수가 있다. 그렇다고 연락을 한다거나 찾아간다거나 하는 물리적 상황을 만든다면 아주 큰 문제가 되겠지만 문득 떠오르는 기억은 어쩔 수 없다. 내 마음 아주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던 기억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과거를 회상하게 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다. 내 삶의 한 단락을, 청춘을 함께 했던 사람을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거다.
사실 첫사랑이 생각나는 건 그 사람 자체가 그립다기보다는 그 시절이 그리운 경우가 많다.
그때만 할 수 있었던 활활 불타오르는 사랑.
그 나이 때에만 할 수 있던 유치하고도 순수했던 사랑.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사랑이 삶의 전부였던 시절.
첫사랑이 소중한 것은 더 이상 그런 사랑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처음 하는 연애가 첫사랑이라고 확실히 정의 내릴 수도 없다. 첫사랑이라는 건 사랑을 했던 순서에 상관없이 그렇게 문득 그리워지는 시절에 했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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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을 못 잊던 친구가 있었다. 이별 후 5년은 더 지났지만 그녀의 얘기만 나오면 눈물을 글썽였고 되돌릴 수 없는 시간에 대한 후회로 가득한 삶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어떻게 연락이 닿아 친구에게 첫사랑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설레하는 친구의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친구가 첫사랑과 만나고 온 날,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첫사랑 만나니까 어땠어?”
“정말 그리워했던 사람을 만나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반갑기는 했는데 그때의 감정이 안 들더라. 여전히 예쁘고 여전히 같이 있는 게 즐거웠지만 그 친구도 많이 변했고 나도 변했어. 순수했던 그때의 우리가 아니더라.”
그렇게 씁쓸한 표정은 본 적이 없었다. 첫사랑을 만나기 전 설레하던 친구의 표정과는 너무 상반된 표정이라 내가 다 난감할 정도였다. 나는 첫사랑에 대해 더 깊이깨달았다.
첫사랑은 그저 순백의 기억으로 남기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을. 다시 만나게 된다고 해도 그때의 감정을 느끼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그게 세월이고 시간의 흐름이고 어쩔 수 없는 숙명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