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마 쿰 라우데'
"성함이 어떻게 되실까요?"
하루에 300번도 넘게 하는 말!
서울소재 대학병원 본원 한방병원 약제과 약무직으로 원내 약국에서 근무한 지도 1년이 훌쩍 넘어가고 있다.
한 때는 지금의 대학병원에서 의료진 명찰을 달고 근무하는 것이 꿈이었던 시절도 있었고, 이곳에 합격하면 많은 고민과 근심이 사라지지 않을까 기대했던 적도 있었는데.
그 달콤한 왕관을 쓰려면 견뎌야 하는 무게와 편두통은 가늠하지 못했었다^^
새벽 6시쯤 일어나 험난한 출근길을 뚫고 8시경 대학병원에 도착하면, 원무과 접수가 시작되기도 전에 의료원 로비에는 많은 환자들이 대기하는 풍경을 볼 수 있다. 대학병원 입구에서부터 원내 한방약국까지 가는 길이 몇 백 걸음쯤 될까? 2~3분가량의 막판 출근길에서부터 나의 굵고 짧은 처절한 기도는 시작된다.
"오늘하루 무사히 큰 사고 없이 약을 틀리게 조제하고, 투약 실수 하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덧붙여 어려운 환자와 원활히 소통할 수 있게 도와주시옵고, 위협적인 돌발상황이 벌어지지 않게 지켜주시오며, 무사히 무사히 퇴근까지 주의 은총이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라 쓰고 거의 빌다시피..) 하며 원내 약국까지 눈을 질끈 감고 경건히 들어간다.
내가 처음부터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며 출근을 했던 것은 아니다. 으레, 거뜬히 입원약 조제며 줄줄이 투약이며 그럭저럭 해낼 줄만 알았지..?!
일 년여간 수많은 시행착오와 자잘한 실수..이지만 그것이 곧 의약적 '근접오류'(Near miss =환자가 해를 입을 수 있었으나, 사고가 발생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즉 예방이나 운이 좋아서, 우연하게, 적절한 중재 등으로 환자에게 해가 발생하지 않은 사고를 일컫는다) , '위해사건'(Adversed event= 환자가 이미 앓고 있는 질환에 의한 것이 아닌 의료서비스 제공을 받는 중에 발생한 신체 및 정신적 상해를 의미한다. 사건은 발생했으나, 치료가 가능한 경우이다) 이기도 한 일련의 사고를 침으로 인해 책임선생님들로부터 무시무시하게 혼나며 각성하게 된 나는! 이제는 출근 직전 다시 한번 정신을 차리기 위해 주문 같은 기도를 술술 읊어내게 되었다.
원내 약국의 비밀번호키를 누르고 약국에 들어서 형광등을 켜면 비로소 내 안의 한약사라는 정체성의 스위치가 on 켜지는 듯했다. 칼퇴근과 함께 off 꺼버린 스위치를 매일 아침마다 다시금 켜며 때로는 긴장감에, 때로는 막막함에, 때로는 뿌듯함에, 또 때로는 권태로움이 켜지는 듯했지만 육아휴직에 들어간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매일 아침을 새로이 전환하여 시작할 수 있다는 것도 꽤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속한 대학병원 본원에는 약제본부와 한방약무팀이 있고 약학대학에서 한약을 전공한 한약사는 약무직으로 입사하는데, 조제파트(첩약을 탕전하고 환약, 가루약을 조제하며 환자에게 직접 투약하는 파트)/예제파트(조제에 앞서 한약재의 검수 및 유효성분을 정량분석 하는 파트)로 나뉜 조직에서 나는 세 번의 입사 지원 끝에 조제파트 중 엑스조제실=원내 1층 한방약국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오전 업무는 입원약 조제가 메인인데 한방병원과 양방병원 협진 입원환자들의 당일/익일 한약을 조제하는 것이다. 한약이라고 하면 보통 배즙액처럼 생긴 파우치에 담긴 다린 물약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엑스조제실에서 다루는 한약은 보통 일반약국에서 감기 걸렸을 때 쉽게 구매할 수 있는 작은 알갱이로 된 한약을 작은 정사각형 은박지 형태로 포장지하여 완제품으로 제작된 과립제를 1000여 종 다룬다. 또한 공진단과 같이 금박으로 입혀진 큰 환약도 주로 쓴다.
물론 오전에 입원약을 조제하면서 외래약도 동시에 조제해야 한다. 특히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외래환자 수가 많아서 혼을 빼어 조제를 하게 되고, 금요일에는 다음날인 토요일과 일요일+월요일 입원약까지 처방 나온 입원약은 모두 조제를 완료해야 하기에 100여 장이 넘는 입원약 처방전을 출력해 폭풍조제하며, 100여 건의 외래약도 오전시간에 함께 커버해야 한다. 한방약국에선 '피의 목요일', '불나는 금요일'이라 불렸다.
대학병원 원내 한방약국 약무직의 업무는 조제와 투약으로 크게 두 섹션을 맡게 되는데, 동료 한약사가 2인 1조로 편성되어 격주로 오전에 A조가 조제/오후에 투약을 하고 그다음 주엔 B조가 오전에 투약/오후에 조제를 하는 식으로 업무 순서가 순환된다.
생각해 보면 학부생 때나 일반약국에서 근무할 때는 '투약'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지 않았는데 대학병원에 입사하고 투약(administration of medicine, 질병회복, 건강증진, 질병예방을 목적으로 약물을 이용하는 방법을 말한다) 을 자주 사용하게 된 것 같다.
투약의 꽃은 복약지도 및 상담인데, 주로 대학병원에 외래로 내원한 환자들이 진료과 교수님께 처방받은 한약을 받아갈 때 환자정보를 확인하고 복용법을 설명하며 올바르게 약을 전달하는 일련의 과정을 포함한다. 코로나19가 창궐하던 때에 서울의 홈플러스에 위치한 1인 약국에서 매약을 했던 나로서는 처음엔 대학병원 복약지도도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약국과는 다르게 대학병원은 암을 포함하여 소아과, 부인과, 중풍뇌질환 등 다양한 질병을 치료하는 한약 약물군이 존재하고 (무려 1000여 가지..) 그에 따른 복용법과 주의사항이 다르기에 투약 시 환자들의 돌발질문(이 한약 다른 양약 하고 먹어도 돼요? 소양인인데 이 한약 어떻게 복용해야 하죠? 지난번 한약하고 맛이 다른데 어떤 차이가 있죠? 아기가 복용할 건데 유통기간이 어떻게 되나요?...)에 전문적으로 대처하려면 한약학 전공지식과 원무과, 진료과를 아우르는 커뮤니케이션 능력도 필요했다. (물론 전화 민원응대까지!)
하루 평일 8시간 근무에 4시간 이상은 서서 조제를 하고 투약 시에도 종종 기립해서 근무해야 했기에 다리 부종은 날로 심해졌고.. 회기에서 분당까지 뚜벅이 출퇴근을 하는 나로서는 임신 중인 현 상황에서는 빠른 육아휴직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 평균 300여 건의 처방전을 받아 입원약 외래약을 조제 및 투약했고, 이른바 프로모션이라 불리는 병원 행사기간에는 하루 500여 명! 의 조제건을 감당해야 했는데 종종 꿈에서도 재고 조사를 하거나 한약을 조제하고 환자를 만나는 일도 많았다.(약국 다닐 때는 꿈에서 무좀약! 을 팔기도 했다는!!)
이십 대까지는 사실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인정욕구와 결핍을 안은 채로 미친듯한 열정을 쏟아내며 대외활동과 업무에 매진하곤 했었는데. 삼십 대가 되고 지금의 대학병원에 입사하고부터는 이제야 겨우 철이 든 건지 지친 건지 나 자신을 예전처럼 채찍질하고 반추하고 괴로워하는 빈도가 적어졌다.
이를테면 이전에는 꼭 내가 맡은 모든 업무에 있어서 '잘'하고 싶었고, '잘'해야만! '잘'한다고 인정받아야만 끝내 안도했고 그때까지는 어쩐지 모를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지금은 뭐랄까 잘하는 것도 좋겠지만 묵묵히 해나가는 것 그 자체에. 나의 위치와 역할 그 자체에 긍정하고 하루하루 수긍해 가며 내 임무에 다다르는 것에 그저 의의를 두며 지낸다. 진짜 그저 교통사고 없이 출퇴근에 다다르면 다행이다 안도하고, 그 어떤 환자와 상황을 만나도 퇴근 이후에는 스위치를 끄고 off.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겠지! 하며 지내고 있다. 그러다 보면 무례하게 굴던 환자들도 지나가고 또 어떤 날엔 나를 찾는 환자도 생기고 말이다.
환자가 감사 인사로 준 음료수!
그러다 보니 일상을 살아가며 느끼는 핵심감정도 [불안함, 떨리는, 초조한, 긴장되는]에서-> [나른한, 안도하는, 기대되는]으로 전환되고 있다. 한방심리학에서 감정은 욕구에서부터 비롯되는데 욕구가 충족되면 긍정적+ 감정 / 욕구가 불충족되면 부정적- 감정이 올라오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어쩌면 아직 미숙하고 좌충우돌 한약사이지만 거대한 대학병원 의료조직에서 명확한 역할을 부여받고 수행을 해야 하는 과정에서 뚝딱거리면서도 하나씩 조제와 투약 업무를 배우며, 하루에 200여 명의 환자를 매일 만나 소통하는 순간들이 점차 소속의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하도록 촉매가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오랜만에 예전에 사놓았던 책 한 권을 다시 폈는데, 우연찮게 이런 구절이 있었다.
"저는 학생들에게 이 아기 천사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공부에 지치고 세상이 자신을 보잘것없게 만들어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더라도 언제나 자기 스스로를 위로하는 케루빔 천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줍니다.
남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으며 세상의 기준에 자기 자신을 맞추려다 보면 초라해지기 쉬워요. 하지만 어떤 상황에 처하든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때 자기 자신을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훗날에는 그런 사람이 한 번도 초라해져 본 적 없는 사람 보다 타인에게 더 공감하고 진심으로 그를 위로할 수 있는 천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 또 무언가에 '숨마 쿰 라우데(최우등)'입니다."
<라틴어 수업- 한동일 저자(흐름출판)>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 출신이자 신부님이신 한동일 저자의 세상이 자신을 보잘것없게 만들어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더라도 언제나 자기 스스로를 위로하는 케루빔 천사가 되어야 한다는 책의 메시지에, 대학병원 한방약국에서 근무하며 환자정보를 잘 못 파악해 약을 잘 못 투약하고 약물코드를 헷갈려 조제 실수를 하던 스스로에 실망하고 초라해지는 순간들에 위로하는 법을 배운다.
모자라고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나의 자리에서 나의 역할을 묵묵히 해가고 그러한 순간들이 모여 나는 그리고 우리는 자신에, 또 무언가에 '숨마 쿰 라우데(최우등)'가 된다는 구절이 잔잔한 용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