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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YMassart Dec 10. 2021

올여름 나를 찾아온 반가운 손님

Y. Y. Massart, <영원한 사랑>, 2021년 7월(William Bouguereau의 <프시케의 황홀경>에서 영향)


올여름 신비로운 경험을 했다. 내가 글을 쓰는 2층 서재의 창문에 나비가 날아와 놀다 갔다. 매일 찾아오는 나비. 나는 나비를 보며 예전에 책을 쓰며 다루었던 두 작품을 떠올렸다. 존 에버렛 밀레이의 <눈먼 소녀>와 프랑수아 제라르의 <프시케와 에로스>이다.


영국의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는 1856년에 <눈먼 소녀>를 완성한다. 두 소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언뜻 보기에도 언니와 동생인 것이 틀림없다. 다정히 꼭 잡고 있는 손은 두 소녀의 따뜻한 사랑을 품고 있다. 두 소녀는 손풍금으로 거리연주를 하며 떠돌이 인생으로 살아가는 방랑자다. 그런데 벌이가 그리 넉넉하지 못한가 보다. 그녀들의 허름한 옷이 여기저기 터져 있다. 삶이 얼마나 힘든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어느 날 소낙비가 내렸다. 대지가 숨을 쉬기 시작했다. 향기로운 꽃향기가 마음을 달랜다. 물방울의 노랫소리가 귓전에 머물고 있다. 대지의 넉넉함과 포근함이 두 소녀를 끌어안고 있다. 화가의 붓의 여정 또한 쉬어가고 싶은 전원이다. 소낙비로 인해 세상의 탁함과 더러움이 모두 쓸려 내려갔다. 멈추어진 공간 속엔 저기 보이는 무지개처럼 꿈과 희망만 남아있다. 시공이 하나 되어 두 소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시간을 멈추게 했고 그 공간 속에서 두 소녀는 평온의 향기에 젖어있다.


그런데 소낙비가 내리고 간 흔적을 두 소녀는 각각 다르게 지각하고 있다. 자연은 동생과 언니에게 이중으로 다가가고 있다. 동생은 제일 먼저 저 멀리 떠있는 아름다운 무지개에 매료된다.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언니는 지긋이 눈을 감고 소낙비가 남기고 간 상큼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있다. 촉촉이 젖은 대지와 풀포기의 촉감을 손으로 느끼려 한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동생은 언니에게 그리고 언니는 동생에게 각각 자신이 보고 느낀 풍경을 잠시 후에 설명해줄 것이다. 그러나 동생이 본 무지개와 언니가 느낀 자연의 상큼함이 제대로 전달될 리는 만무하다. 더욱이 각자 느낀 감동도 즐거움도 다를 것은 물론이요, 상대편의 설명 보단 각자 자신이 맛본 자연의 느낌에만 의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심안으로 본 사람과 육안으로 본 사람의 차이점이 있을 것이다.


자세히 보면 언니의 숄에 나비 하나가 사뿐히 앉아 있다. 나비 하면 프랑수아 제라르(François Gérard, 1770-1837)가 제작한 <프시케와 에로스>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백조처럼 아름다운 프시케의 몸매. 에로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그 프시케의 머리 위에 나비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프시케(Psyche)는 ‘영혼’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소녀의 숄에 앉아 있는 나비는 앞을 못 보는 소녀의 영혼으로서 그녀를 인도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소녀의 삶을 걱정하는 부모님의 영혼은 아닌지? 자연이 연주하는 아름다운 음절에 나비가 춤을 추듯, 화폭이 전해준 자연의 리듬은 우리의 영혼을 위로한다.


동생은 언니의 좋은 안내자일 것이다. 이와 같이 동생의 육안은 언니의 육안이기도 하다. 반면 동생이 걸어갈 삶의 인도자는 언니 몫이다. 언니의 심안은 사랑하는 동생의 심안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둘이 함께 의지하며 살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올여름 2층 서재의 창문에 놀러 왔던 나비를 보며 나는 남편의 영혼을 생각했다. 그리고 내 삶을 인도해줬던 남편의 심안도 떠올려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나비는 나를 남편에게 안내하고 있었다.


나비를 보며 나는 윌리암 부그로의 <프시케의 황홀경>을 데생으로 그렸다. 불멸의 삶에 도달한 프시케의 나비 날개는 작지만 아름다웠다. 사랑하는 남편 에로스의 따뜻한 품에 안겨 남편의 세계 즉 신의 세계로 올라가는 프시케. 나는 이 장면이 너무나 부러웠다. 그래서일까 나는 둘이 아닌 하나가 되고 싶은 마음을 묘사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올여름 나비는 나에게 더없이 반가운 손님이었다.



존 에버렛 밀레이, <눈먼 소녀>, 1856년


프랑수아 제라르, <프시케와 에로스>, 17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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